상처투성이가 된 채로도 우뚝 선 사람. 너덜너덜해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사람. 가수 겸 배우 박효신이 뮤지컬 ‘베토벤’ 두 번째 시즌에서 보여주는 베토벤을 짧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시즌1 종연 후 한 달여 만에 돌아온 이 공연에서, 박효신은 한층 깊어진 비극과 짙어진 고독을 꺼내 놓는다. 한쪽 발목을 고통에, 다른 한쪽 발목은 절망에 담근 삶. 그러나 베토벤은 고통과 절망이 자신을 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유/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노래하는 박효신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터뜨릴 기세로 울려 퍼질 때, 관객들은 비로소 비운의 음악가가 아닌 불굴의 음악가로서 베토벤을 마주한다.
줄거리는 시즌1과 비슷하다. 배경은 베토벤이 40대 초반이던 1810년. 온 유럽이 찬양한 천재 음악가는 괴팍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자신을 후원하는 귀족에게도 고개 숙일 줄 모른다. 이런 베토벤에게 청력 상실은 사형 선고와 마찬가지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밝히는 유일한 빛이 음악이라서다. 시즌2에서 추가된 노래 ‘절벽의 끝’은 당시 베토벤이 느꼈을 절망을 표현한다. 영웅 교향곡을 다듬은 이 곡에서 베토벤은 “나는 비참하게 죽어가”라며 절규한다. 실제 베토벤은 귓병이 악화한 1802년 죽음을 예견한 듯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로 알려진 이 문서에서 베토벤은 “죽음이 언제 오든 나는 기꺼이 맞을 것”이라면서도 “내가 가진 예술적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동안은 설령 내 운명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박효신이 연기하는 베토벤은 배우 본인의 궤적과 캐릭터의 정수가 시너지를 일으키는 사례다. 생의 끝자락에서 “내게 남은 건 음악뿐”이라고 읊조리는 삶. 인생의 절반 이상을 가수로 살며 한때 “음악은 나를 완성시켰지만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그림자이기도 했다”고 고백했던 박효신은 음악이 고뇌의 이유이자 해방 통로였던 베토벤의 삶을 이해할 적임자다. 음악에 삶이 짓눌려 괴로워하던 베토벤이 마침내 삶의 고삐를 자기 손에 쥐고 “자유 아니면 죽어”라고 외치는 1막 마지막 장면은 특히 압도적이다. 베토벤이 슬픔과 두려움, 혼란과 고통을 떨쳐내고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박효신을 발라드 가수로만 기억하는 관객은 이 장면에서 깜짝 놀랄 수 있겠다. 박효신은 로커처럼 날카로운 고음을 뽑아 올리며 관객들을 황홀경에 빠뜨린다. 절박하다시피 열정적으로 악보를 쓰는 2막 엔딩도 압권이긴 마찬가지. 박효신은 목소리뿐 아니라 눈빛과 몸짓으로도 영혼이 담긴 음악을 표현한다.
극본을 쓴 극작가 미하엘 쿤체는 베토벤이 청력을 잃는 고통 속에서도 위대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힘이 ‘불멸의 연인’과의 사랑에서 나왔다고 봤다. 제작진이 주목한 인물은 안토니 브렌타노. 베토벤을 만났을 당시 그는 이미 결혼해 세 아이를 둔 상태였다. 둘의 사랑은 축복이기보다는 비극이다. 시즌1 공연은 안토니의 결핍에 집중했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갇혔던 안토니가 베토벤을 만나 진정한 꿈을 찾는다는 설정이었다. 시즌2는 남편 프란츠의 악행을 부각한다. 그는 외도를 일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안토니 아버지의 유품을 마음대로 처분하려 든다. 작품은 안토니가 느꼈을 상실감을 강조해 ‘결국 불륜’이라는 지적을 돌파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같은 항로 변경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가갈지는 미지수다. 베토벤과 안토니의 사랑이 서로를 어떻게 구원했는지보다, 안토니의 외도에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가 먼저 읽혀서다.
헐거운 고리를 붙드는 건 배우들 몫이다. 배우 윤공주는 행복을 이루려 분투하는 벌새 같다. 운명이 삶을 옥죄는 순간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거짓된 삶을 단호히 끊어낸다. 청력을 잃어가는 베토벤을 위해 이별을 얘기하는 순간조차 목청을 높이는 그를 보며, 관객들은 안토니가 품은 사랑의 깊이를 상상하게 된다. 배우 조정은과 옥주현이 같은 역할에 캐스팅됐고, 베토벤은 박효신·카이·박은태가 번갈아 연기한다. 공연은 커튼콜로 완성된다. 뒷짐을 진 채 무대 뒤편으로 걸어나가던 박효신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관객 쪽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인다. 객석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250년 전 세상을 뜬 음악가는 그렇게 2023년의 관객과 연결된다. 베토벤의 이야기도 고통과 위기가 아닌 치유와 극복의 서사로 마침표를 찍는다. 어쩌면 제작진이 바란 대로, 베토벤이 이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미소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연은 오는 15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