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스톤’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개발, 출시한 디지털 온라인 카드게임이다. 인기 게임 프랜차이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의 세계관과 캐릭터들을 차용해 성공적인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예시를 선보인 하스스톤은 국내에도 2013년 10월부터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실시하면서 돌풍 같은 관심을 이끌며 등장했다.
게임 개발자로서 의외라고 여겨질 수 있으나, 고등학생 때 나는 게임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기숙사에서 친구들이 모바일 핫스팟을 켜 당시 한국 런칭 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리그 오브 레전드’를 삼삼오오 몰래 플레이 할 때에도, 나는 차라리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편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게임을 좋아하긴 했지만 특별히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못 느꼈달까.
그런데 2013년 10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즉 특히 수능을 앞둔 시점이었다. 블리자드의 신작이 갑자기 공개돼 일부 한국 유저들도 클로즈 베타를 수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게임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호평 일색이었다. 그런 기분이 있지 않은가? 평소엔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게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비로소 그 욕망이 생기는 그런 기분. 내가 딱 그랬던 것 같다. 수능을 앞두고 클로즈 베타에 당첨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능 직전에 하스스톤의 클로즈 베타 테스터로 당첨될 수 있었고, 당시 콘텐츠가 많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이 새롭고 독창적인 게임 시스템과 연출에 감탄하며 열심히 플레이했다. 수능 전날에는 긴장을 풀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책을 펴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게임만 하기로 하고 하스스톤을 즐겁게 플레이했다. 수능을 마치고 돌아온 날 저녁에도 하스스톤을 플레이했던 기억이 난다.
하스스톤은 카드게임인 만큼 피지컬을 동반한 화려한 플레이 같은 것은 볼 수 없지만, 장르의 특성상 꾸준히 머리를 쓰고 전략을 연구하면 성과를 낼 수 있는 게임이다. 이는 당시 ‘스타크래프트’, 리그 오브 레전드, ‘카트라이더’ 등 게임의 영상이나 방송 경기를 보는 데에서 얻는 쾌감과는 완전히 다른 즐거움을 주었는데, 이에 나도 당시 인벤(Inven)에서 진행하는 국내 하스스톤 대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방송을 위한 전용 서버도 없고, 이렇다 할 인터페이스 지원도 없이, 선수들도 해설자들도 열악한 환경에서 경기를 중계하고 대회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게임에 대한 열정만으로도 충분했다. 대회에 참여한 선수, 중계진, 시청자들 모두 열광하고, 몰입하고, 응원하면서 대회와 게임은 국내에서 나란히 인기를 얻어갔다.
당시 대회에 참여해 활약 중이던 ‘팀 선비’라는 이름의 하스스톤 팀이 성균관대학교 소속 동아리라는 사실을 입시를 앞두고 알게 되었다. ‘핸섬가이’, ‘FeelFree’, ‘도곡2동’ 등, 당시의 팀 선비는 옛 하스스톤 팬들이라면 열광할만한 선수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그게 뭔가 대학에 대한 내 로망을 더 채워줬던 것 같다. 입시를 앞두고 성균관대학교에 지원해둔 상태였는데, 막연한 내 기대감을 높여줬다.
실제로 성균관대학교에 합격했고, 신입생 때 우연히 팀 선비의 선수들과 연락이 닿게 되었다. 게임과 e스포츠 문화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들은 팀 선비를 학교의 정식 지원을 받는 중앙e스포츠동아리로 만들고 싶어했다. 당시 나는 보드게임의 매력에 푹 빠져서 신입생의 패기로 보드게임 동아리를 만들려고 홍보 중이었는데, 이런 열정을 보고 팀 선비 측에서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중앙e스포츠동아리를 만들고 홍보하고 유지하기에 이미 구성원들이 학번이 좀 높았던 터라 어리고 에너지 넘치는 신입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연락을 받고 무척 기뻐하며 팀 선비를 도와 중앙e스포츠동아리로 만들었다. 그 다음 해에는 내가 회장이 되었다. 팀 선비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수원에 있는 캠퍼스에서 가입한 회원까지 합하면 명부에 적힌 회원만 200여명이 넘었다. 그때는 동아리 회장이 마냥 좋고 명예로운 자리인걸로만 알고 뛸 듯이 기뻐했는데, 당연히 금방 후회했다. 어마어마한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지금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가장 큰 부분 중 하나는, 게임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게임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의 직업, 커리어, 심지어 인생이 될 것이란 생각은 해볼 기회가 없었다.
우선 e스포츠 선수들. 비록 아마추어 레벨일지라도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엿볼 수 있던 것은 무척 귀중한 순간이었다. 당시 게임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느 종목의 프로 선수들 못지 않게 끊임없이 그 작은 화면 속에서도 고민하고, 연구하고, 노력했다. 게임에 대해 진심인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도 진지하게 임하게 되었다. 우리 팀원들이 중요한 경기에서 패배했을 때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서로를 위로했고, 승리했을 때는 함께 자연스럽게 벅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도 직접 대회에 선수로서 나가는 영광도 누릴 수 있었다. 당시 동아리내에서 출전자를 가리기 위해 내부 선발전을 치렀는데, 내 상대는 이미 아마추어 대회에서 유명해질대로 유명해진 실력자, ‘도곡2동’ 선수였다. 다들 내부 선발전에 큰 이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준비에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있던 분위기였는데, 나는 대회에 꼭 나가고 싶었다. 밤을 새가며 이 선수의 플레이 영상을 찾아가며 분석했고, 최대한 그의 약점을 노릴 비열한 전략을 준비해갔다. 작전은 성공했고, 친한 동아리 형이기도 했던 도곡2동 선수는 심하게 어이없어하며 내 데뷔를 축하해줬다. 다행히 해당 대학 교류전에서는 실시간 중계 경기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값진 승리를 거두어 성균관대 대표로서의 명예를 드높였다.
그 후에도 자잘한 여러 경기를 직접 나가기도 하고, 눈물겨운 우승을 거두기도 하고, 아쉬운 패배를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 모든 경험 하나하나가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경험할 수 없었을 드라마였다. 남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열정적으로 임했고, 또 그게 무척 좋았다. 중요한 경기에서 프로를 꺾는 슈퍼 플레이를 하여 관중석의 환호가 방음벽과 헤드셋을 뚫고 내 귀까지 들려왔을 때의 짜릿함. 숙적을 이기기 위해 갖은 준비를 했지만 끝내 이기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을 때 ‘준비 많이 했네’라는 인정을 들었을 때의 회한. 갖은 고난과 역경을 뚫은 끝에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고 상금으로 다같이 회식을 할 때의 행복감까지.
어떻게 길을 바꾸어 게임업계에 가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은데, 나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대답하곤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팀 선비에서 느낀 감정들이 무의식적으로 내 가치관과 꿈에 영향을 줘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게임이 만들어내는 힘과 열정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큼 강력한 것이었고,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
이유원
1995년생. 초등학생 때부터 독학으로 인디게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어느새 3년차 게임회사 대표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글로벌리더학부를 졸업하고, '아류로 성공하느니 오리지널로 망하자'는 회사의 모토를 받들어 올해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자퇴했다. 게임 기획자로서 '허언증 소개팅!' '중고로운 평화나라' '서울 2033' 등 기존에 없던 소재와 규칙의 게임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NDC, G-STAR, 한국콘텐츠진흥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지역 고등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인디게임 기획과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에 대해 강연해왔다.
yuwon@banjihaga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