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가운데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려 퍼진다. “언니이~!” 반갑게 손을 방방 흔드는 여성과 이를 무심히 바라보는 또 다른 여성. 이들은 방금 만난 사이다. 의뭉스러운 속내를 감춘 여성은 화사하게 웃는다. 영화 ‘리볼버’(감독 오승욱)에서 배우 임지연이 연기한 정윤선은 복수심으로 점철된 하수영(전도연)에게 밝은 낯으로 다가간다. “딱 요만큼만 언니 편”이라면서 그를 돕더니 또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언뜻 보면 파악이 참 어려운 인물을 임지연은 이렇게 표현했다. “‘무뢰한’의 어린 김혜경(전도연)이에요. 그런데 조금 더 톡톡 튀는?” 씩 웃는 얼굴이 정윤선과 달라 묘했다.
임지연이 ‘리볼버’의 세계에 빠져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무뢰한’으로 이미 차진 팀워크를 보여준 오승욱 감독과 전도연이 9년 만에 재회한 작품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재학 시절 ‘한예종 전도연’을 자처했던 만큼, 출연 제안에 곧장 “올레!”를 외쳤단다. 지난 1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임지연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 판에 들어가 놀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고 말했다.
극 중 임지연은 유흥업소 마담인 정윤선으로서 거침없이 활보한다. 여러 인물과 모두 얽힌 그는 참 바쁘다. 비슷한 처지인 조사장(정만식)과는 격의 없고 비리 경찰 신동호(김준한)에겐 불량하지만 깍듯하며, 돈줄인 본부장(김종수)에겐 설설 긴다. 제 살길은 귀신같이 파악하는 그가 하수영에겐 어쩐지 애매모호하다. 조력자인 듯하다가도 완전한 편이 되어주진 않는다. “불쌍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하수영이 생각보다 ‘쿨’한 거예요. 같은 처지인 줄 알았더니 삼단봉 휘두르며 손에 피를 묻히고 직진하죠. 같은 여성으로서 반할 수밖에요. 응원하고 도와주다가도 습관처럼 배신은 하고… 이 모든 게 묘한 느낌을 주길 바랐어요.”
예측불허한 정윤선을 맡은 임지연의 각오는 이전과 달랐다. 늘 모든 배역을 철저한 계산 아래 준비했지만 이번만큼은 본능에 의지했다. 자잘한 표정까지도 계획해 연기했던 그에게 이 같은 시도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가니 지문에도 없던 ‘언니’ 소리와 자잘한 손동작이 술술 나왔단다. 임지연은 “이렇게까지 본능적으로 연기한 건 처음”이라며 “솔직히 칭찬해 주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스스로를 믿자 생동감이 더욱 붙었다. “상대성과 관계성이 중요한” 정윤선은 그렇게 ‘리볼버’를 휘젓는 열쇠가 된다.
정윤선이 된 임지연은 표정을 마구 일그러뜨린다. 활짝 웃는 얼굴부터 경악에 물들고 입 찢어지라 웃는 모습까지, 감정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강렬한 모습에 그가 연기한 넷플릭스 ‘더 글로리’ 박연진의 면면도 스친다. 하지만 박연진과 정윤선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임지연은 “일단 보면 다르다고 느낄 것”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연진이를 떠올리는 분이 많을 거란 걸 알아요. 하지만 그 이미지를 깨부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솔직히 달라 보일 자신 있거든요.” 정윤선을 연기하며 자유와 해방감도 느꼈다. 임지연에게 ‘리볼버’는 알을 깨고 나온 첫 시작이다.
“계산 없이 연기하는 맛이 좋더라고요. 저는 재능이 많지 않은 배우여서 늘 분석에 많은 시간을 쏟았어요. 하지만 배우는 혼자 준비한 것만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리볼버’를 해보니까, 악착같이 치열하게 하는 것보다 내려놓고 놀아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그렇게 연기할 만한 작품과 캐릭터를 또 만나길 바라요. 이제야 알을 깨고 나왔으니 좀 더 과감하게, 밀도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배우 모습보다 인물 자체로 보이는 연기요. 전도연 선배님처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