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북한에 자생적인 시장 경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마당과 상점, 고급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돈을 굴리는 돈주(錢主)는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형태의 뇌물 구조가 뿌리내렸다. 국제사회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도 계획 경제도 아니고, 자생적인 시장경제다. 그러나 대다수 북한 주민은 여전히 살벌한 독재 체제의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는 북한의 심장으로 불리는 평양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10년간 조사를 해왔다. 탈북자 100여명을 상대로 장기간 심층면접을 하고, 각종 자료 수집을 통해 평양의 시장경제 작동 시스템을 분석했다. 폐쇄적인 북한 내부를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북한의 통계자료와 탈북자들의 증언 역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사한 북한 사회와 경제의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이 처한 현실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새롭게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연재한다. |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의 중앙 배급제가 붕괴하면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자생적 물류 유통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오늘날 북한 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 잡으며 시장경제의 싹을 틔우는 변화를 불러왔다.
개인 상인과 돈주가 주도하는 유통 네트워크, 장마당 중심의 상품 흐름, 북·중 무역 연계 등은 북한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시장화는 유통 중심에 머물러 있으며, 생산과 금융 중심으로 확장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1. 북한의 자생적 물류 유통 체계의 주요 특징
● 개인 주도의 네트워크
북한의 물류 유통 체계는 국가 주도의 중앙집권적 방식이 아닌, 개인상인과 돈주(자본가)에 의해 주도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본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상품을 조달하고 유통망을 운영한다. 예컨대 돈주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상품을 들여오고, 이를 장마당 상인들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개인 주도의 네트워크는 자신들의 자본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상품 조달 및 유통망 운영을 이끌며, 북한 사회에서 시장경제 확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다양한 운송 수단 활용
북한에서는 국가 주도의 공식 운송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주민들은 다양한 비공식 운송 수단을 활용해 물자를 이동시켰다. 특히 돈주들에 의해서 차 사업소가 다시 운영되고, 기차도 렌트해서 운영하고 있다.
▶돈주에 의해 운영되는 시외버스: 차 사업소가 붕괴하면서 돈주들이 중국으로부터 버스를 사 와서 차 사업소 명의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시외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시외버스 고객은 80%가 상인과 장사 물품들이다. 나머지는 공무원의 공무수행, 친척 방문하는 사람, 군인 등이다.
▶전문적인 운송회사: 중국에서 식량 및 생활필수품 수입 및 국내 유통 사업을 위한 운송회사가 설립됐다. 대외경제성 산하 연운회사가 대표적이다.
▶써비차: 개인 또는 군부 소유 차량으로, 장거리 물자 운송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기차 화물칸: 열차 화물칸은 뇌물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이용된다. 대량의 물자를 한 번에 이동시키는 데 유용하다. 북한의 기차는 전기 사정으로 1주일이나 걸리지만 돈주들이 투자하여 렌트한 기차는 매우 빨라서 하루 정도밖에 안 걸린다고 한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손수레: 단거리 운송에는 오토바이나 자전거, 손수레 같은 소규모 운송 수단이 활용된다.
이처럼 다양한 운송 수단은 중앙 배급제 없이도 물자를 유통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며, 주민들의 경제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 장마당 중심의 유통
장마당(시장)은 단순히 상품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넘어, 지역 간 상품 흐름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장마당에서는 농산물, 공산품, 중국산 제품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된다. 이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한다. 특히 평양과 평성 같은 주요 도시의 도매시장은 전국적인 유통망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 북·중 무역 연계
북·중 무역은 북한 자생적 물류 유통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를 연결하는 루트를 통해 중국산 상품이 80%, 훈춘-나진선봉루트 20%가 북한에 유입된다. 이들 상품은 평양과 평성 새벽 도매시장을 거쳐 전국으로 분배된다. 이러한 북·중 무역은 북한 내부 시장에서 외부 상품 공급을 가능하게 하며, 주민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도 기여하고 있다.
2. 북한의 자생적 물류 유통 체계의 주요 사례
● 북한의 시외버스터미널
북한은 철도망이 자주 고장 나거나 비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외버스 시스템을 발전시킨 결과, 시외버스는 북한 사회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시외버스는 단순히 사람의 이동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 간 물자 운송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 운송 품목으로는 농토산물, 수산물, 공산품 등이 있으며, 이는 북한 내 경제와 상업 활동에서 필수적인 기반 시설로 자리 잡고 있다. 아래는 북한 주요 시외버스터미널의 특징과 역할이다.
▶토성 시외버스터미널: 토성 시외버스터미널은 평양시 락랑구역 토성에 위치한 공터에 세워져 있는 터미널이다. 이 터미널은 사리원, 해주, 개성, 함흥, 원산 등 북한 주요 도시로 연결되는 노선을 운영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사리원과 개성 같은 경제적·상업적 중요 도시로 가는 노선은 주민들의 경제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함흥과 원산 같은 동해안 지역으로도 연결되어 지역 간 교류를 촉진하고 있다.
▶연못 시외버스터미널: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 3대혁명전시관 앞 공터에 위치해 있는 터미널이다. 이 터미널은 평성, 신의주, 신안주, 남포 등으로 연결되며, 평양에서 서쪽 및 북서쪽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신의주(중국과의 국경 도시)로 가는 노선은 무역 및 물자 이동에서 전략적 의미를 가지며, 남포(항구 도시)로 가는 노선은 해상 물류와 연계된 이동 경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연못 터미널은 북한 내 경제와 무역 활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평성 시외버스터미널: 평안남도 평성시에 위치한 평성 시외버스터미널은 수십 개의 노선을 운영하며 신의주를 포함한 다양한 지역으로 연결되고 있는 터미널이다. 평성은 대규모 의류, 신발, 술 등 가공품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이 터미널은 전국적인 물자 이동과 상인의 이동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신의주로 가는 노선은 중국과의 교역 및 국경 무역에서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평성에는 여러 개의 시외버스 터미널이 존재하며, 각 터미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행 노선을 제공해 지역 간 교류를 활성화하고 있다.
북한의 시외버스터미널은 단순한 교통 시설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반 시설이다. 이는 주민들의 생계와 경제 활동을 지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가 주도의 교통망 부족 문제를 보완하고 있다. 토성 시외버스터미널과 연못 시외버스터미널 같은 평양 중심 터미널들은 전국 주요 도시와 연결되고 있다. 평성 시외버스터미널 등 지방 터미널들은 각 지역 간 연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 북한의 철도교통
북한에서 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국가 경제와 주민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차량 보급률이 낮은 탓에, 철도는 화물을 대량으로 운송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전국을 촘촘히 연결하는 교통망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주민들이 철도 관계자나 화물칸 관리자에게 소소한 뇌물을 건네 자신들의 물건을 화물칸에 실을 수 있도록 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현금은 물론, 식량이나 담배 같은 물품도 오가는 정겨운 광경이다. 공식적으로는 국가 소유인 화물칸이, 실질적으로는 지역 주민들의 개인적인 화물 운송에 활용되는 암묵적인 협력 관계도 존재한다.
장마당 상인들은 철도를 통해 지방 특산물을 대량으로 이동시키며 생계를 이어가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평안남도의 평성은 북한 내에서도 손꼽히는 중요한 도매시장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특산물이 거래되는 활기 넘치는 곳이다. 동해안의 싱싱한 해산물, 산간 지역의 귀한 약초와 농산물이 철도를 타고 평성으로 모여든다. 중국에서 들어온 다양한 제품들도 평성을 거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간다. 새벽녘 평성 도매시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활발한 거래를 펼친다.
이처럼 북한의 철도와 화물칸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주민들의 생존과 경제 활동을 돕는 소중한 도구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북한 물류의 중심축 연운회사
북한의 대표적인 운송회사인 연운회사는 대외경제성 산하에 속해 있으며, 북한 내 물류와 국경 무역을 담당하는 핵심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 선교구역 방직공장 인근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 회사는 북한 경제와 시장의 변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개인 자본가인 돈주들과의 협력을 통해 북한 내 물류 시스템을 혁신적으로 운영하며, 국가와 시장경제 간의 접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연운회사는 약 700~800대의 트럭을 보유하며, 북한 물류 수송의 50~60%를 책임지고 있다. 이 회사의 주요 운송 경로는 평양-신의주, 평양-남포 등 주요 도시를 연결하며, 국경을 통한 무역 운송에도 깊이 관여한다.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한 중고 트럭을 활용하여 운영비용을 절감하고, 실질적인 물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연운회사의 가장 큰 특징은 운송 물량의 약 80%가 개인 돈주들의 상품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돈주들은 북한 내 시장경제 활성화의 주체로, 중국 등지에서 수입한 상품을 유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운회사는 이러한 돈주들과 협력하여 상품 운송을 지원함으로써 국가와 개인 간 협력 모델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물류를 넘어 북한 경제 구조 변화의 한 단면을 상징한다.
특히 연운회사는 국경 무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국과의 교역 과정에서 수입된 상품들은 연운회사의 네트워크를 통해 북한 전역으로 유통된다. 이를 통해 연운회사는 단순한 운송 기업 이상의 역할, 즉 북한 경제 활동 전반에 걸친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 주도의 경제 시스템 속에서도 개인 돈주들과 협력하여 물류 효율성을 높이고, 중국과 일본 등 외부 세계와의 연결 고리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북한 경제가 점차 폐쇄적 계획 경제에서 벗어나 시장경제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3. 북한의 자생적 물류 유통 체계 : 시장경제 요소
북한의 자생적 물류 유통 체계는 단순히 중앙 배급제 붕괴 이후 주민들의 생존 전략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는 시장경제 요소를 반영한 중요한 경제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중앙 배급제 붕괴 이후의 대안: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중앙 배급제가 사실상 붕괴하면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자체적인 유통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는 초기에는 비공식적이고 자발적인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직화하고 효율성이 높아졌다.
▶시장경제 확산과 경제 활성화: 자생적 물류 유통 체계는 북한 경제 내부에서 시장경제 요소를 확산시키고 있다. 개인 상인과 돈주가 주도하는 이 체계는 기존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며, 지역 간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폐쇄적 경제 구조 완화: 북·중 무역 연계를 통해 외부 상품이 북한 내부로 유입되면서 폐쇄적인 북한 경제 구조가 점차 완화되고 있다. 이는 주민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며 생활 수준 향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유통 중심 시장화의 한계
북한의 자생적 물류 유통 체계는 시장경제 요소를 반영하며 발전했지만, 유통 중심의 시장화에 머물러 생산과 금융 중심의 시장화로 확장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북한의 시장화는 유통망 확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장마당과 도매시장을 기반으로 개인 상인과 돈주가 주도하는 물류와 상품 유통이 활성화되었지만, 이는 주로 외부에서 들여온 상품을 재분배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국가 주도의 생산 체계와 연계가 부족하며, 생산 부문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지방 공업은 소규모로 운영된다. 전국적 생산 네트워크 형성이 미약하다.
북한 내 생산 기반은 자급자족형 구조에 머물러 있다. 대규모 산업화나 효율적인 생산 체계는 부족하다. 이는 유통망이 활성화되어도 내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주요 원인이다.
금융 시스템은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자본 축적과 대규모 투자로 이어질 수 있는 금융 시장이 부재하다. 이는 유통망 확장만으로 경제 전반의 성장을 견인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초래한다.
북한의 자생적 물류 유통 체계는 주민들의 생존 전략에서 시작해 경제 활동을 활성화했지만, 생산과 금융 부문으로 확장되지 못하면서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북한 경제가 유통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이루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생산과 금융 중심의 시장화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유통 중심 모델은 외부 의존성을 심화시키고 내부 경제 자립성을 약화할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