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약품 관세 부과 시점을 가시화하면서 한국 제약·바이오 업계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 생산시설이 없는 국내 기업들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현지시간) “향후 2주 안에 제약 산업에 대한 품목별 관세 부과 조치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날 백악관 집무실에서 의약품 제조 촉진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의약품 가격과 관련해 다음주에 큰 발표를 할 것”이라며 “전 세계 다른 나라와 비교해 우리는 매우 불공정하게 갈취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의약품에 25% 이상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초 특정 수입 의약품이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한 무역확장법 232조 조사를 개시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수입 의약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기 위한 사전 조치라는 해석이 나왔다.
의약품이 관세 부과 대상에 포함되면 미국 시장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는 국내 제약업계도 유탄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국의 의약품 최대 수출국이기 때문이다.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대미(對美) 의약품 수출액은 지난 2023년 약 10억 달러(한화 약 1조4600억원)에서 지난해 15억 달러(약 2조2000억원)로 크게 늘었다. 한국의 전체 의약품 수출에서 미국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 기준 18%에 달한다.
한국 정부는 적극 대응에 나섰다. 보건복지부는 미국 수입 의약품 안보영향 조사에 대한 정부의견서를 4일(현지시간) 제출했다고 밝혔다. 의견서에는 한국산 의약품 수입이 미국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공급망 안정과 환자 접근성 향상에 기여하는 만큼 관세 조치는 불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바이오협회도 5일(현지시간) 한국과 같은 동맹국에서 생산된 의약품과 의약품 원료는 관세 부과 대상에서 면제될 수 있도록 요청하는 내용의 공식 의견서를 보냈다.
“이번엔 분위기 다르다…바이오시밀러·CDMO 기업 영향권”
특히 관세 부과 방침 발표 이후 미국 내 생산기지 설립 필요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에는 제약사가 미국 내 새로운 생산시설을 건설하면 환경보호청(EPA)이 절차를 간소화하고, 식품의약국(FDA)이 불필요한 규제 등을 폐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반대로 해외에 있는 제조 시설에 대해서는 검사 수수료를 인상하고, 유효 성분(active ingredient)의 보고 이행을 강화하는 등 까다로운 규제를 적용하도록 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철강·알루미늄 등처럼 의약품의 미국 내 생산을 유도하겠다는 방침이다.
트럼프 취임 이후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은 미국 내 생산기지 확대를 위한 투자 계획을 잇달아 발표하며 대책을 준비해왔다. 일라이 릴리, 머크(MSD), 존슨앤드존슨, 노바티스, 로슈, 애브비, 암젠, 리제네론 등 200조원이 넘는 빅파마의 투자금이 대거 미국으로 몰려드는 상황이다. 영국계 다국적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도 미국 메릴랜드주의 신규 공장을 공개했다고 폭스비즈니스가 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반면 국내 주요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들은 미국 내 생산기지가 없어, 매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저렴한 비용을 경쟁력으로 내세우는 바이오시밀러 수출 기업들 역시 관세 사정권에 직접 노출될 위험이 높다.
이에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 국내 주요 CDMO 기업들은 미국 내 생산기지를 인수하거나 신규 설립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셀트리온은 7일 “장기 대응 차원에서 진행 중인 미국 현지 원료의약품 생산시설 확보의 경우 예비 검토를 끝내고 종합적인 내용들을 포괄한 상세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며 “제반 사항을 살펴 근본적이고 지속 가능한 리스크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홈페이지에 공지했다. 인천 송도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도 미국 내 생산시설 인수를 위해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7일 쿠키뉴스에 “미국 내 생산시설 설립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한 만큼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며 “지금까지는 바이오 공장 설립에 대한 규제가 강해 완공까지 오래 걸렸는데, 이 절차를 간소화하겠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 FDA가 승인한 70개의 바이오시밀러 중 미국 기업 다음으로 한국 기업이 허가를 많이 받았다. CDMO 기업들도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관세 부과 방침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부 차원의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중국을 억제하면서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오지만, 한국이 아닌 일본이 그 수혜를 입을 가능성도 높다. 일본은 미국 내 자국 생산기지가 있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산업계와 경쟁국들의 전략을 공유하며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응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