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스테이블코인, 답 없는 속도전 [취재진담]

원화 스테이블코인, 답 없는 속도전 [취재진담]

기사승인 2025-08-28 17:07:33
게티이미지뱅크. 

“최근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일종의 ‘열풍’처럼 번지고 있지만, 한국에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최근 만난 한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뭐 하나 명확한 게 없는데, 관련 소식만 나와도 코인이나 주가가 급등하는 등 과도한 기대가 형성돼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테이블코인은 한국 금융권과 정치권에서 어느새 ‘핫 키워드’가 됐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기업 간 MOU와 각종 사업계획서에는 스테이블코인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글로벌 사업자 서클이 국내 은행과 접촉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시장이 술렁였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낯설었던 개념이 이제는 혁신의 상징처럼 소비되고 있다. 

하지만 들뜬 기대와 달리, 정작 ‘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이 없다. 미국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세계 시장을 장악한 건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배경 덕분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300조원 규모로 역외 시장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어, 미국 입장에선 이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본이나 유럽도 자국 통화 국제화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다.

반면 한국의 사정은 다르다. 원화는 글로벌 수요가 제한적이다. 국내 투자자들조차 글로벌 코인 거래에서 테더나 서클을 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돼도 원화 자체의 경쟁력이 없다 보니 사용량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다. 글로벌 기업도 원화 결제를 외면하는 상황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제 결제·송금 수단으로 성장한다는 기대는 공염불에 가깝다. 

제도적 기반 역시 여전히 출발선에 머물러 있다. 한국은 가상자산 분야에서 외국인의 국내 진출도,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도 막혀 ‘갈라파고스’에 비유될 정도다. 거래소 외 다른 가상자산 사업은 자리 잡기 어렵다. 혁신을 꿈꾸던 가상자산 창업자들은 대다수 문을 닫거나 해외로 떠나는 실정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와 규제 권한을 둘러싼 논의마저 지지부진하다. 서클 대표의 방한이 새로운 투자나 협력으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한국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되면 대규모 인출 사태(뱅크런)와 비슷한 ‘코인런’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법정화폐와 1:1로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은 대량 상환 요구 시 국채 등 준비자산을 급히 매각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학계는 ‘수요 없는 경쟁’을 가장 큰 위험으로 꼽는다. 미국과 달리 수요가 부재한 한국시장에서 진입장벽까지 낮아지면, 고금리 이자·리워드 경쟁이 과열되고 소비자 보호가 뒷전으로 밀린다는 우려에서다.

스테이블코인은 세계적 흐름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 걸맞는 해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구호만 앞세운 속도전은 혁신이 아니라 실험에 가깝다. 지금 필요한 건 ‘빨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왜 필요한지’와 ‘어떻게 설계할지’에 대한 답이다. 정부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미래는 없다.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
최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