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도 못 틀고 내복 입는 여름…‘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의 고통

선풍기도 못 틀고 내복 입는 여름…‘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의 고통

국내 환자 100~150명 추정 극희귀질환
상병코드조차 없어 진단·치료 ‘깜깜이’
급성 용혈에 가족 유언 준비하는 환자들
“따뜻한 혈액으로만 수혈…‘엔제이모’ 급여 필요”

기사승인 2025-09-16 17:21:14 업데이트 2025-09-16 17:33:42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에서 ‘희귀질환자의 건강권 보장 강화를 위한 건강보험 제도 개선 정책 토론회’가 개최됐다. (왼쪽부터) 김연숙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관리실장, 정진향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사무총장, 최영현 미래건강네트워크 이사,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장준호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신대현 쿠키뉴스 건강생활부 기자, 김국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관리실장. 유희태 기자

“저는 지금 보이지 않는 고통을 홀로 감내할 수밖에 없는 고독감 속에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려야만 하는 무력감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삶을 이어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한랭응집소병 환자 A씨)

국내 환자 수가 약 100~150명으로 추정되는 극희귀질환 ‘한랭응집소병’이 별도의 상병코드도 없이 국가 관리 밖에 놓여 있다. 치료제는 있지만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환자들은 제한적인 대증치료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정확한 진단과 신속한 치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준호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에서 개최된 ‘희귀질환자의 건강권 보장 강화를 위한 건강보험 제도 개선 정책 토론회’ 발제를 통해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은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겪지만, 질병 정보가 거의 없고 의료진조차도 생소해 진단과 치료가 매우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토론회는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최하고,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쿠키뉴스가 주관했다.

한랭응집소병(Cold Agglutinin Disease, CAD)은 면역체계의 이상으로 체내 적혈구를 공격해 적혈구 파괴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자가면역성 희귀질환의 일종이다. 한랭응집소라는 자가항체가 정상 체온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적혈구를 응집시켜 면역체계의 일부인 고전적 보체 경로를 활성화해 만성 용혈(적혈구의 세포막이 파괴되는 현상)을 일으킨다.

한랭응집소병은 빈혈과 혈전성 합병증을 유발하며 체온보다 낮은 온도에 노출 시 △일상생활이 어려운 극심한 피로감 △지속적 용혈에 따른 만성 빈혈 △호흡 곤란 △혈색소뇨증 △말단청색증 △혈전색전증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중 혈전 발병률은 1000명당 30.4명으로 비(非) 한랭응집소병 인구 1000명당 18.6명 대비 2배가량 높게 나타난다.

한랭응집소병 환자는 기온이 낮은 겨울철에만 증상이 악화되는 것이 아니다. 체온보다 낮은 에어컨 바람에 노출돼도 용혈성 빈혈을 겪을 수 있다. 특히 한랭응집소병 환자가 느끼는 피로감 수준은 류마티스 환자와 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 환자가 경험하는 수준과 유사하다는 보고가 있다. 헤모글로빈(적혈구에서 산소 운반 역할을 맡는 단백질) 수치가 갑자기 3~4㎎/㎗까지 떨어지면 일어서지 못할 만큼 심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또 적혈구가 파괴되면 혈전(피떡)이 생기는데, 혈전이 주요 장기의 동맥을 막아서 심장마비, 뇌경색 등을 초래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랭응집소병이 60~70대에 갑자기 나타나는 데다 환자 수가 적어 의료진조차 병을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한랭응집소병 진단·치료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별도의 상병코드가 없어 ‘기타 자가면역성 용혈성 빈혈’로 분류돼 정확한 환자 수조차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치료법도 제한적이다. 응급조치인 수혈로 일시적 증상 완화를 기대할 수 있지만, 합병증 위험을 높일 수 있다.

한랭응집소병 신약인 ‘엔제이모’(성분명 수팀리맙)가 2023년 7월 식약처 허가를 받아 치료를 위한 길이 열렸지만,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사용이 어렵다는 점 또한 장애물이다. 고전적 보체 경로를 활성화하는 C1s 단백질을 표적하는 엔제이모는 한랭응집소병 치료에 허가된 유일한 약제로 미국과 영국 등에서 1차 치료 옵션으로 권고되고 있다.

장준호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희귀질환자의 건강권 보장 강화를 위한 건강보험 제도 개선 정책 토론회’에서 ‘국내 희귀질환자 치료 환경 및 건강권 보장 현황’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유희태 기자

환자들은 진단도, 관리도, 생활도, 치료도 어려운 한랭응집소병의 치료 접근성 개선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환자들은 심장에 부담이 가 상체를 숙이지 못한다. 양말도, 신발도 가족이 신겨줘야 하고, 다리의 떨림과 불편함으로 밤새 5~6번 이상 깨 늘 피곤하다. 산소 공급이 안 되니 머리는 늘 멍한 상태이고, 일상생활에서 아주 간단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니 소화 기능이 떨어져 유동식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여름은 이들에게 더 고역이다. 여름에도 내복을 입어야 하고, 땀이 나도 선풍기조차 쉽게 틀지 못한다. 집 안 보일러는 항상 높은 온도에 맞춘다. 외출할 때는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담고 다닌다. 에어컨이 나오는 지하철에 타려면 긴 바지와 두꺼운 신발, 스카프로 몸을 감싸야 한다. 심지어 과일, 요구르트 같은 음식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야 한다. 냉장고에 있는 그릇을 꺼내거나 차가운 물을 잠시라도 만지게 되면 피부가 빨갛게 부어오르면서 빈혈 증상이 나타난다.

한랭응집소병 환자 A씨는 “병을 관리하기 위해 일상을 철저히 통제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가지만, 알 수 없는 요인으로 병이 활성화되고 생명이 위험한 상황을 몇 번 겪게 되니 일상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외출하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며 “너무 숨이 가빠 움직이는 게 고통스러울 땐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봄에는 급성 용혈 위기를 겪어 부고와 영정 사진까지 준비하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A씨는 “급격한 위기가 오거나 임시방편 치료조차 여러 부작용을 겪게 되면서 점점 더 희망이 사라져 가는 것 같다”며 “저와 같은 환자들이 치료제가 있음에도 경제적 장벽 때문에 무너지지 않게 해달라”고 촉구했다.

한랭응집소병 환자 B씨는 “엔제이모 투여 후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며 환자들이 적은 부담으로 치료제 계속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B씨는 “교수님께 ‘치료를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가슴 철렁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다시 예전처럼 아프고 힘들었던 죽음과도 같았던 시절로 돌아가게 될까 무섭고 불안하다”라며 “이 약이 꼭 건강보험에 포함돼 다른 환자들도 부담 없이 치료를 이어갈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전했다.

장 교수는 “일본은 엔제이모가 보험이 적용돼 300명 정도의 환자가 혜택을 보고 있다”며 한랭응집소병 산정특례 적용과 치료제 급여화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장 교수는 “한랭응집소병은 단순한 빈혈이 아니다. 일반 혈액이 아닌 따뜻한 혈액으로만 수혈해야 하는 등 전문적이고 고가의 처치가 필요하다”며 “어떤 사람들은 ‘평생 수혈만 하고 살 수는 없을까’라고 묻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삶의 질은 중증 만성질환자 수준으로 떨어지며, 직업 유지조차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에어컨, 냉장고, 겨울 모두 환자에겐 위협이다. 환자 수가 적더라도 치료제가 있고, 효과가 확실하다면 국가는 반드시 이들을 지켜줘야 한다”며 “이재명 대통령은 ‘희귀하다고 포기하지 않고, 난치라고 외면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런 나라가 꼭 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