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전환 속도가 빨라질수록 노동자의 ‘사생활’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재택근무 중 키보드 입력 횟수를 측정하고, 콜센터 상담원의 음성을 분석해 감정 상태를 평가하는 등 ‘전자감시 노동’이 확장되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 ‘성과 관리’ 이름 아래 노동자를 감시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마우스 5분 멈추면 ‘경고’…초 단위 감시, 일상이 되다
16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국내 다수 기업이 ‘생산성 관리’ 명목으로 직원의 PC 활동을 실시간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한 IT기업 재직자 A씨는 “재택근무 중 5분 이상 키보드나 마우스 입력이 없으면 자동으로 ‘비활성’ 상태로 기록된다”며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지난 13일 국회에서 열린 ‘전자 노동감시 실태 및 법제도 개선 과제’ 토론회에서도 IT업계의 감시 실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송가람 화섬식품노조 엔씨소프트지회장은 “엔씨소프트가 15분 이상 자리를 비운 직원에게 사유를 소명하게 하는 시스템 도입을 검토 중”이라며 “마우스 움직임을 감지해 활동을 추적하는 방식은 사생활의 자유와 인격권을 침해한다”고 비판했다.
물류·플랫폼 산업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배달의민족·쿠팡이츠 등 배달 플랫폼 라이더들은 앱에 위치확인시스템(GPS) 정보 24시간 수집을 허용하지 않으면 운행할 수 없다. 구교현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지부장은 “과거에는 ‘앱 사용 중에만 허용’이 가능했지만, 지난해부터 일방적으로 24시간 수집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최근 접수된 사례도 심각하다. 한 현장직 노동자는 “관리자가 법인차량 GPS를 계속 확인하며 특정 장소 방문 이유를 일일이 캐묻는다”며 “유급휴가를 사용한 이후부터 이 같은 보복성 감시가 시작됐다”고 호소했다.
직장갑질119가 노동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8.9%가 직장에서 △업무 중 인터넷 사용 기록 △메신저·이메일 내역 △GPS 위치추적 △마우스·키보드 활동 감지 등의 정보가 수집·활용되고 있다고 답했다. ‘초 단위 감시’가 더 이상 특정 업종의 문제가 아닌 셈이다.
‘성과관리 도구’로 둔갑한 감시…형식적 동의와 규제 공백
문제는 이런 전자감시를 규제할 제도적 장치가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현행 근로기준법과 개인정보보호법에는 전자감시에 관한 명확한 조항이 없다. 기업은 이를 ‘근태관리’나 ‘업무 효율화’ 도구로 신고하면 합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게다가 다수의 노동자가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형식적으로’ 동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떤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배가영 직장갑질119 활동가는 “회사가 노동자 정보를 수집하면서 동의조차 받지 않거나, 형식적 동의를 강요하는 사례가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결국 애초 근로자 관리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용자가 마음만 먹으면 감시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 특히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자 등 협상력이 약한 계층일수록 강도 높은 감시에 노출되고 있다.
권석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노동위원회 변호사는 “현행 개인정보법의 가장 큰 맹점은 ‘동의’만 있으면 감시가 정당화된다는 점”이라며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권력 불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제도이며, 그 동의가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책임 떠넘기기’식 대응도 도마 위에 올랐다. 노동자들은 고용노동부를 전자감시 피해 해결의 1차 창구로 인식해 신고를 접수하지만, 노동부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소관’이라며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정보보호위도 근로감독이나 제재 권한이 없어 신속한 대응이 어렵다.
“효율보다 인권”…근로기준법 개정 요구 커져
전문가들은 유럽연합(EU)의 일반개인정보보호규정(GDPR)을 참고해 한국도 ‘직장 내 데이터 최소 수집 원칙’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GDPR은 △업무 목적 외 데이터 수집 금지 △감시 행위 사전 통지 △노동자 동의 철회권 등을 명시해 AI 기반 근로자 모니터링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디지털 효율화’ 정책 기조 속에 기업의 기술 도입이 법보다 앞서가고 있다. 토론회에서도 “기술은 이미 인간의 감정과 집중도를 읽는데, 법은 여전히 출퇴근 카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권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전자감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노사 간 대등한 합의가 있을 때만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며 “감시의 목적·범위·방법을 근로계약에 명시하고, 위법하게 수집된 정보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노동부에 명확한 감독 권한을 부여해 근로감독관이 직접 사업장에 출입, 위법 행위에 대한 시정명령과 과태료 부과가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