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희생자들이 권리를 위임해 주지 않는 이상, 자네에게 용서할 권리는 없네.”
마이크를 쥔 언남고 장새하군(1학년)이 독서토론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을 또렷이 읽어 내려갔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독서토론 발표회지만, 학생들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발표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독서토론을 통해 익힌 ‘경청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달 31일 중구 바비엥2 교육센터에서 ‘2025 서울형 심층 쟁점 독서‧토론 프로그램 학생 실천 사례 발표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서울 고교생과 박사 연구자가 한 팀을 이뤄 한 권의 책을 두고 치열하게 사고를 확장한 결과물을 공유했다.
‘서울형 심층 쟁점 독서·토론’은 학생·교사·박사 연구자가 함께 책을 읽고 쟁점을 정리해 토론·글쓰기로 확장하는 프로그램이다. 단순한 독서 활동이 아니라 ‘지적 탐구 실험’에 가깝다.
2023년 첫해 94개교로 시작해 올해는 100개교(140팀), 박사 연구자 108명이 참여하며 3년 차를 맞았다. 이날 발표회엔 △동북고 △상계고 △언남고 △한서고 △홍익디자인고 △화곡보건경영고 등 6개교가 참여했다.
이날 발표회에 참여한 6개교는 각기 다른 주제로 탐구 결과를 공유했다. 동북고는 《종의 기원》 등을 바탕으로 ‘적자생존 시대, 인간의 공존’을 탐구했으며, 상계고는 ‘가짜 뉴스와 데이터 왜곡’ 문제를 다뤘다. 언남고 학생들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를 읽고 ‘전쟁과 용서’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이어 한서고는 ‘지속 가능한 행복’의 의미를 탐색했고, 홍익디자인고는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을 탐구했다. 마지막으로 화곡보건경영고는 《탄소로운 식탁》을 기반으로 ‘친환경 식습관’ 실천 사례를 발표했다.
학생들은 저마다의 지적 탐구 과정을 비중 있게 발표했다.
3년 연속 참여한 동북고 2학년 장준명군은 “토론은 책상 위에서 끝나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6차 대멸종’에 관한 글을 칼럼으로 정리하여 지역 신문에 게재를 추진했다”며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상계고 2학년 호세진군은 “통계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수치 너머의 진실을 찾고 사회 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도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서고 2학년 정민호군은 “토론을 경험해보니, 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토론이 필요한지 크게 느꼈다”며 “한 개인이 우물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토론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토론의 가치를 역설했다.
홍익디자인고 2학년 김소윤양은 “이전에는 ‘예쁘게’ 만드는 게 우선이었지만, 책을 통해 디자인이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임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화곡보건경영고 학생들은 “‘지구의 ESG는 비건, 사람의 ESG는 저당’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환경과 건강을 모두 지키는 ‘비건 저당빵’ 개발 실천으로 이어갔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진지한 발표에 박사 연구자들도 학생들이 기특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 교사들은 제자들의 ‘지적 성장의 순간’을 뿌듯해 하며 사진으로 남기기 바빴다.
강태원 언남고 교사는 소감을 묻자 “처음엔 학생들이 질문을 만드는 것부터 어려워했지만, 반복할수록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박사 연구자와 협업하면서 토론의 깊이가 한층 깊어졌다”며 “학생들이 연구자에게 자유롭게 질문하며 주제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교육의 방향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이상수 서울시교육청 교육정책국장은 “과거 우리 사회는 선진국을 쫓아가는 추격형 경제였기에 지식을 암기하는 능력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서 남이 가지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력과 비판적 사고력이 필요하다”며 “생성형 AI 시대일수록 AI가 쏟아내는 정보를 심도 있게 살피고 바로잡기 위해 더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하며, 이 프로그램이 바로 그런 미래 역량을 함양하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김경하 학생역량‧혁신교육과 장학관은 “여섯 개 학교의 발표를 들으며 우리나라의 앞날이 얼마나 밝을지 기대가 되어 감동적인 시간이었다”며 “학생들이 하나의 질문을 끝까지 파고들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탐구를 통해 이 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큰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번 프로그램을 ‘고교-대학 간 동반성장형 인지 교류 모델’로 평가하며, 내년엔 교과 융합형과 창의적 체험활동형을 더 확대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