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 이후 우리나라의 원자력추진잠수함(원잠) 건조가 승인되는 등 ‘자주국방’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전쟁 발생 시 동원되는 민간 기업·기관 대비책의 실효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정부가 비상대비계획(충무계획)을 운영 중이지만 긴급복구자재·식료품 등 핵심 물자의 수송과 배분 체계가 구체적이지 않아 개선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대한민국비상계획관협회(한비회)는 14일 서울 여의도 한국산업은행 대강당에서 ‘비상대비 발전 포럼’을 열고 이 같은 문제점들을 논의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비상대비계획은 국가비상사태 시 정부의 전쟁 수행 능력 강화, 효율적 군사작전 지원, 전시 국민 생활여건 보장과 피해 최소화를 목표로 마련된 범정부적 대비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기업과 기관에 비상대비업무를 전담하는 비상계획관을 지정해두고 있다.
하지만 비상대비계획이 현재 안보 환경 변화에 맞지 않아 전면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전시 동원을 연구해 온 박계호 전 단국대 초빙교수는 이날 포럼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전면전·총력전 양상으로 전개되며, 전쟁은 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정부가 함께 수행하는 것”이라며 “전시에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 아무리 군이 싸워도 전쟁은 끝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군사적 위협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지만, 국가 비상대비업무에 대한 정부 대응은 오히려 약화돼 왔다고 지적했다. 위협 양상이 재래식 전력·테러·생화학무기 중심이던 1970~2000년대와 달리 2010년 이후에는 대량살상무기(WMD), 사이버전이 추가됐음에도 관련 조직·인력이 축소됐다는 분석이다.
특히 박 교수는 “보수·진보 정부를 막론하고 비상대비업무 관련 법령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며 “조직과 인원이 줄어든 것은 정부의 비상대비업무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했다”고 꼬집었다.
현장에서도 구체적 문제점이 제기됐다. 실제 전쟁 상황에서 물자를 조달해야 하는 기업임에도 비상대비계획에 명시된 수송체계나 납품지역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즉 정부 지침에 따라 물자를 비축해도 누구에게,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운송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 건축원자재 업체의 비상계획관은 “전시 임무고지량을 생산하려면 협력업체 참여가 필수지만 납품 장소나 전시 수송 차량 지원계획이 전무하다”고 밝혔다. 일부 방산기업·에너지기업도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일부 정부 부처의 수송계획은 동원업체에 전달조차 되지 않았고, 제조업체가 필요로 하는 원자재에 대한 수송계획 역시 부재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동원 물자 생산 수량과 비축 품목 선정 기준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기업의 실제 생산능력이나 제한사항 반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 방산기업 관계자는 “정부 비축 원자재가 1980~1990년대 기준 품목인 경우도 있어, 전쟁 양상 변화와 무기체계 발전에 따라 신규 비축 품목을 다시 선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현장 관계자는 “올해 철강 2만t을 생산하라는 임무고지가 내려왔지만, 지난해까지의 생산량은 1만4000t이었다”며 “추가 생산해야 할 6000t이 어떤 종류인지, 어디로 공급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충무계획상 전시 요구 수준을 만족시키기 어려워 군 요구량과 업체 생산량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전략비축탄 등 물자는 평시에도 일정 수준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 주문 수량(MOQ) 운영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이어 “업체 생산능력과 제한사항을 산업통상부와 소요부서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며 “업체가 생산라인을 변경하면 즉시 산업부에 통보하고, 산업부는 이를 고려해 충무계획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수 한비회 회장(KDB산업은행 비상계획관)은 “비상대비업무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관련 내용을 하나라도 법제화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