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연인, 동거인: 오르탕스
19세기 말 파리, 예술의 중심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조용히 시간을 쌓아갔다.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 현대 회화의 문을 연 화가 그리고 오르탕스 피케(Hortense Fiquet, 1850~1922), 그의 연인이자 가장 오랜 모델이다. 두 사람은 1869년 파리에서 만났고, 20년의 동거 끝에 결혼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연인이나 부부의 범주를 넘는다. 그것은 예술과 인내, 관찰과 침묵의 교차점이었다.
<빨간 안락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은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다. 시인 릴케는 이 작품을 보고 “그림의 각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르탕스는 붉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지만, 그녀의 존재는 의자보다 더 깊고, 색채보다 더 조용하다.
30살의 세잔과 19살의 오르탕스가 제본소의 여공으로 돈을 벌기 위해 모델을 서면서 만났다. 오르탕스의 초상화는 30여 점 가까이 된다.
오르탕스는 뮤즈인가, 실험 대상인가?
세잔은 그녀를 풍경처럼, 정물처럼 바라봤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 반복되는 포즈, 한 작품에 백 번 넘는 모델링. 오르탕스는 가장 빈번한 모델이었고, 아마도 가장 인내심 깊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붓터치로 덮여지고, 그림자는 색의 면으로 분해되었다. 그 결과, 그녀는 가까우면서도 멀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온다.
세잔은 자신의 회화를 “자연과 평행한 조화”라고 표현했다. 오르탕스의 초상은 그 조화의 실험장이었다. 감정이 배제된 얼굴, 압축된 공간 그리고 색채의 구조적 탐구. 이 모든 것이 세잔의 회화가 인상주의를 넘어 구조와 형태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 기여했다.
오르탕스는 세잔의 뮤즈였을까, 혹은 그의 실험 대상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었고, 세잔은 말없이 그렸다. 그 침묵 속에서 예술은 태어났다.
지금 국내에서 전시되고 있는 작품으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세잔 부인이 정원용 철제 테이블에 팔을 기대고 앉아 있다. 청녹의 푸르름으로 얼굴과 손에 드리우며 전체적인 조화와 통일감을 추구했다.
사랑하지 않는 여인, 가장 많이 그린 얼굴
세잔은 여성에 대한 집착과 소심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오르탕스와 동거를 시작한 계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남녀 사이의 사정은 밖에서 알기 어려운 법이고, 모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오르탕스가 임신했을 때, 세잔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는 “돈이 없으면 금방 슬퍼진다”고 말하던 낭비가였고, 아버지의 송금에 의존해 살고 있었다. 세잔이 9살 때 고향 엑상프로방스에서 은행을 설립한 아버지는 곧 하늘이었다. 친구들과 어머니 외에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세잔의 그림 속 오르탕스는 종종 무표정하고 뒤룩뒤룩하게 묘사되었다. 때로는 젊게, 때로는 보기 흉하게. 존경하는 세잔을 찾아 함께 작업했던 에밀 베르나르는 “세잔은 부인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결혼 이후의 초상화는 드물었고, 완성까지 수년이 걸리기도 했다. 이 작품은 두사람이 알고 난 뒤 20년 뒤에 그려졌다.
숨겨진 오르탕스와 폴, 드러난 자리
세잔은 아버지에게 오르탕스와의 관계를 숨겼다. 하지만 오르탕스의 아버지가 파리의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를 ‘세잔 부인’이라 표기했고, 이 편지가 세잔 가에 도달하면서 갈등은 증폭되었다. 결국 세잔의 아버지는 손자 폴을 인정하지 않았고, 생활비를 절반으로 줄였다.
생계가 어려워지자 세잔은 졸라에게 매달 60프랑씩 돈을 빌렸고, 오르탕스는 바느질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세잔은 아내를 아내로서 인정하지 못했고, 마마보이로 어머니에게서도 독립하지 못했다.
세잔과 오르탕스가 함께 지낸 시간은 많지 않았다. 결혼은 인정받지 못했고, 아들은 16년 동안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그림 속에만 존재했고, 현실에서는 늘 어긋나 있었다.
세잔에서 마티스로
이 작품은 얼굴이 단순화되어 타원으로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관람자와 시선은 마주치지 않는다. 얼굴과 배경의 색채의 뉘앙스가 미묘한 세잔 특유의 방식과 어우러진다. 마티스는 이 작품을 소장하며 세잔의 회화적 접근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형태의 단순화와 색채의 조화를 적극 반영한다.
그 예가 1953년 마티스 기증한 <루마니아 블라우스>이다. 마티스는 세잔의 굵은 선과 평면적인 색채 처리를 이어갔다.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6~1939)의 기록은 세잔의 일상과 부부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그는 날씨에 집착했고, 한밤중에 깨어나 양초를 들고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기분이 좋으면 아내를 깨워 감정을 나누었고, 그 방해에 대한 보상으로 카드놀이를 함께 했다.
세잔은 아픈 아내를 아들과 파리로 보내기도 했고, 친구 초대를 받곤 셋이서 여행을 떠나는 등 평범하고 상식적인 가장은 아니었다. 부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한 세잔은 오르탕스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이혼했다. 그러나 아들 폴은 세잔에게 유일한 구원이었고, 17년간 아버지의 반대를 견디며 가족을 지켜낸 세잔의 삶은 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세잔은 아버지의 연금으로 경제적 자유를 누렸지만,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유일하게 돈을 쓰는 일이 삯마차를 불러 당뇨병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러 가는 일이었다.
예술이라는 형벌: 그림은 끝나지 않았다
1906년, 세잔은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아내 오르탕스와 아들 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오르탕스의 마음이 식었기 때문이다, 또는 재단사를 만나느라 늦었다는 추측도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세잔의 죽음은 모티브에서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던 중 가을비를 맞고 쓰러진 데서 비롯되었다. 인사불성이 된 다음 날에도 그는 정원의 보리수 아래로 나가 붓을 들었다. 그림은 그에게 생명이자 형벌이었다.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그렸다. 새로운 회화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세상의 비웃음 속에서도 자신에게 과제를 부과했다. 아무도 그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다. 세잔의 삶은 시지프스(Sisyphus)였다.
파리 앙주에서 붉은 드레스의 기억
약 20년 동안 세잔은 아내 오르탕스의 초상화를 29점 남겼다. 그 그림들은 크기도, 완성도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1880년대 후반에 그려진 네 점의 초상화는 특별하다. 오르탕스는 모두 숄 칼라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배경은 파리 앙주(Anjou) 거리 15번지, 부부가 살던 임대 아파트다. 이 연작은 세잔이 아내를 실내 공간에 배치한 유일한 시도이며, 그 중 이 마지막 작품은 배경과 공간 면에서 가장 정교하고 야심 찬 구성을 보여준다.
정교하게 꾸며진 실내, 붉은 드레스의 반복,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 이 조합은 세잔의 회화적 실험과 감정적 거리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기울어진 균형 속의 세잔 부인
노란 등받이 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정면을 향했지만, 그 눈빛은 어느 한 곳을 응시하지 않는다. 얼룩진 푸른 벽이 그녀의 뒤를 감싸고, 짙은 붉은 띠가 벽을 가로지르며 방 전체를 기울게 한다.
거울은 벽난로 위에 반드시 걸려 있다. 빛은 그녀의 오른쪽 뺨을 환히 밝혔고, 왼쪽은 그림자 속에 잠겨 있다. 마치 그녀의 존재가 두 개로 나뉘어, 몸은 이 방에 있지만, 마음은 어딘가 떠나버린 듯하다.
방 안의 소품들은 무게에 따라 휘어지고, 그녀에 맞춰 배치된 듯하다. 그러나 그 배치는 불안정했고, 그녀는 그 중심에 있었지만,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이 방 전체를 물들인다. 릴케는 그 침묵을 ‘감동적으로 잠정적’이라 표현했다. 이 초상화는 1907년 파리의 살롱 드 오토에서 열린 화가의 사후 회고전에 전시된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