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패션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국내 패션 플랫폼 시장이 근본적인 재편기에 들어섰다. 중국 C커머스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의 공세가 본격화되며 가격·물류 경쟁이 완전히 뒤흔들린 데다, 국내 패션 소비가 장기간 정체되면서 핵심 소비층 의존도가 높은 여성 패션 플랫폼부터 충격이 집중되고 있다. 내수 침체와 글로벌 플랫폼의 공습이 겹쳐지며 기존 플랫폼 간 격차가 커지고, 일부 플랫폼은 이용자와 거래액에서 급격한 이탈을 겪는 등 시장 전체의 지형 변화가 가속화되는 모습이다.
내수 침체에 온라인 성장도 한계
29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의류 소매판매액은 전년 대비 0.6% 감소한 69조원으로 집계됐다. 신발·가방 판매는 각각 3% 성장했지만, 의류·신발·가방 전체를 합한 패션 소매판매액은 85조원(+0.1%)에 그치며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섬유산업협회가 발간한 ‘2024~2025 패션 소비 실태조사’에서도 올해 패션산업의 핵심 특징으로 양극화와 정체가 꼽혔다. 보고서는 고소득층 중심의 럭셔리 소비가 꾸준한 반면, 중저가 의류 소비는 뚜렷한 위축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중저가 중심 오프라인 의류 매장은 장기간 침체가 이어졌고, 소비자층도 MZ세대와 실버 세대를 중심으로 양분되며 구매 패턴이 더욱 분절됐다는 분석이다.
온라인 시장도 성장세가 꺾였다. 같은 보고서에서 온라인 패션 판매 비중은 2022년 이후 33%대에서 고착 상태로 나타났다. 팬데믹 시기 급증했던 온라인 구매가 유지 국면에 접어들며 월별 구매율·구매 개수 역시 일부 구간에서 감소했다. 특히 20~30대 구매액 감소는 여성 패션 플랫폼의 핵심 소비층이 약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알·테·쉬의 ‘초저가 공습’…여성 패션 플랫폼 먼저 흔든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장을 빠르게 잠식한 것은 중국 C커머머스다. 알리익스프레스·테무는 전 카테고리 초저가 상품을, 쉬인은 패션 전문 플랫폼으로 특화하면서 단기간에 이용자를 폭발적으로 끌어모았다. 국내 진입이 본격화된 지난해 2월 기준 알리익스프레스의 월간활성이용자(MAU)는 전년 대비 818만명(+130%)으로 국내 쇼핑 플랫폼 최상위권을 차지했다. 테무는 국내 상륙 8개월 만에 580만명을 모았고, 쉬인은 같은 기간 MAU가 각각 315%(1월), 280%(2월) 급증하는 등 이례적 확장세를 이어갔다.
초저가 가격과 빠른 물류를 기반으로 한 중국 플랫폼의 공세 속에서 국내 플랫폼의 성적은 플랫폼별로 크게 갈리고 있다. 서울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무신사는 지난해 2월 MAU 505만 명(+19.3%), W컨셉은 +15.4% 성장하며 두 자릿수 증가율을 유지했다. 반면 브랜디는 –43.0% 급락하며 급격한 이용자 이탈을 겪었다. 동대문 기반 보세 의류 브랜드가 많은 지그재그도 이용자가 32.6% 감소했다. 브랜디 운영사 뉴넥스의 사업보고서에서도 매출은 전년 대비 65.7% 감소(572억→196억), 유동부채가 자산보다 253억원 많은 유동성 위기가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희비 갈림’이 플랫폼이 다루는 상품 구조와 고객층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한다. 무신사와 W컨셉은 자체 브랜드·프리미엄 브랜드 등 브랜드 기반 카테고리 비중이 높아 중국 C커머스의 초저가 의류와 직접 경쟁을 피할 수 있었던 반면, 브랜디·지그재그는 보세·저가 트렌드 의류 중심으로 소비자층이 C커머스와 겹쳐 충격이 더 컸다는 것이다. 패션 플랫폼 관계자는 “무신사는 국내 브랜드와 PB를 확장하며 가격 경쟁을 회피한 반면, 브랜디·지그재그는 저가 트렌드 의류 중심이라 C커머스와 정면 승부를 피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프리미엄 큐레이션 플랫폼 29CM는 외형을 꾸준히 늘리며 시장 내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29CM는 올해 거래액이 2년 연속 1조원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W컨셉의 올해 상반기 거래액은 약 5000억원 수준으로 추정되며, 29CM와의 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W컨셉의 MAU 증가와 거래액 규모가 정비례하지 않는 이유로 이용자 구성 차이를 꼽는다. W컨셉은 트렌드·중저가 브랜드 소비가 많은 20~30대 여성 이용자 비중이 높아 방문자는 늘어도 객단가와 전환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구조다. 반면 29CM는 프리미엄 브랜드·고가 라이프스타일 제품 비중이 높아 이용자 증가 폭이 작아도 거래액이 크게 형성되는 구조를 가진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여성 패션 플랫폼 시장은 △초저가(중국 C커머스) △미드레인지(무신사·W컨셉) △프리미엄 큐레이션(29CM) 등으로 빠르게 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가격 경쟁을 정면으로 받는 플랫폼일수록 타격이 크고, 브랜드·큐레이션 역량을 갖춘 플랫폼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높아지는 구조다.
소비자 이탈도 뚜렷…저가·트렌드 중심 구매 확산
실제 소비자 행동 변화에서도 중국 플랫폼의 성장 요인을 확인할 수 있다. 20대 소비자 김지윤(27·여)씨는 “옷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 C커머스 제품과 국내 플랫폼 제품의 품질 차이를 잘 모르겠다”며 “유행 따라 잠깐 입을 옷이라면 쉬인이나 알리가 훨씬 싸고 편하다. 국내 대비 4~5배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어서 굳이 비싸게 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중국 C커머스 플랫폼에서 약 20만원을 결제했다고 말한 오지연(33·여)씨도 “예전에는 에이블리·지그재그를 썼는데 비슷한 스타일을 중국 앱에서 더 싸게 살 수 있으니까 앱을 지운 지 꽤 됐다”고 말했다.
모바일인덱스 자료에서도 국내 여성 패션 플랫폼의 재방문율은 하락 압력을 받고 있는 반면, 테무·쉬인의 체류 시간과 신규 유입은 꾸준히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수 위축과 경쟁 과열 속에서 일부 플랫폼은 오프라인 실험까지 접는 모습이다. W컨셉은 내수 부진으로 백화점과의 시너지에 한계를 느끼고 2024년 모든 오프라인 매장을 철수했다. 2022년 첫 매장 오픈 이후 3년 만의 철수다.
W컨셉은 이후 글로벌몰 개편, 일본 시장 공략 등 해외 중심 전략으로 선회하며 상반기 글로벌몰 매출을 전년 대비 20% 성장시켰다. 국내 플랫폼이 내수 의존도를 낮추고 해외 진출로 활로를 모색하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업계에서는 여성 패션 플랫폼 시장이 올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재편 단계에 들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한 패션 플랫폼 관계자는 “국내 플랫폼은 가격·물류 속도에서 중국 C커머스와 경쟁하기 어렵다”며 “결국 브랜드 소싱·에디토리얼·프리미엄 큐레이션 같은 비가격 경쟁력을 키운 곳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패션기업 관계자는 “내수 회복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알·테·쉬의 성장 속도는 더 이상 일시적 변수가 아니라 시장의 구조적 환경으로 봐야 한다”며 “가격·물류에서 우위를 점한 해외 플랫폼이 빠르게 점유율을 넓히고 있어, 2025년에는 국내 플랫폼 간 시장 지형이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패션 소비가 부진한 데다 온라인 성장률도 정체된 상태에서 중국 초저가 플랫폼의 공습이 겹치며 시장은 전례 없이 재편 압력에 놓여 있다”며 “소비자의 구매 기준이 빠르게 바뀌고 있어, 누가 차별화된 경쟁력을 만들지가 내년 시장의 핵심 변수”라고 진단했다.
추호정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는 “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같은 중국 C커머스의 확장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라며 “극단적으로 낮은 가격대는 젊은 세대에게 매우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국내 플랫폼에도 상당한 압박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추 교수는 “국내 플랫폼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가격으로 맞붙는 방식이 아니라 플랫폼 차원의 품질 검증·전수조사·브랜드 신뢰 구축 같은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지난해 패딩 충전재 논란이 있었을 때 무신사가 빠르게 대응하고 품질을 보증한 사례처럼, 소비자가 ‘여기에는 믿고 살 수 있는 상품만 있다’고 느끼게 하는 큐레이션과 신뢰 신호가 앞으로 가장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