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노쇠’ 속 숨겨진 병리…재택의료 깊이·균형 필요한 이유

모호한 ‘노쇠’ 속 숨겨진 병리…재택의료 깊이·균형 필요한 이유

이상범 대한노인신경의학회 특임이사(서울신내의원)

기사승인 2025-11-27 13:46:27
이상범 대한노인신경의학회 특임이사(서울신내의원)
현대 의료의 패러다임이 병원 중심에서 지역사회와 가정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재택의료’가 핵심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병원 중심의 의료는 질병을 장기별로 쪼개어 분석하는 환원론적(Reductionism) 접근에 기반을 둔다. 이는 급성기 질환을 치료하고 명확한 인과관계를 밝히는 데 탁월했지만, 환자의 삶을 조각내고 분절화(Fragmentation)시킨다는 한계를 지녀왔다.

이에 반해 재택의료는 환자를 삶의 터전인 가정에서 전인적이고 통합적이며, 연속적으로 돌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비환원론적(Non-reductionism) 접근에 가깝다. 다만 여기서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병원의 분절화를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자칫 의학적 정밀함의 포기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재택의료가 단순히 환자를 ‘돌보는(Care)’ 것에 치중하여 ‘치료하는(Cure)’ 전문성을 놓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의료에 불과하다.

재택의료 현장에서는 주로 ‘노쇠(Frailty)’, ‘노인증후군(Geriatric Syndrome)’, ‘근감소증(Sarcopenia)’과 같은 개념들이 통용된다. 이러한 비환원론적 개념들은 분명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보행 속도가 빨라지거나 악력이 세지는 것과 같은 지표의 변화는 환자가 실제로 좋아지고 있는지, 혹은 나빠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직관적이고 강력한 나침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거시적 지표를 통해 환자의 전반적인 기능 회복 정도를 모니터링할 수 있다.

위험한 것은 모든 증상을 이러한 지표나 개념에 치우쳐 바라보고 진단적 사고를 멈추는 태도다. 노쇠는 환자의 상태(State)를 설명해 줄 수는 있어도, 그 상태를 유발한 원인(Cause)까지 규명해 주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거동이 불편해진 환자를 그저 ‘노화에 따른 근감소증’이라고 단정 짓는 순간, 의료진은 더 깊은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게 된다. “나이가 들어 그렇습니다”라는 말은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일지는 몰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없다.

진짜 원인은 따로 있을 수 있다. 치료 가능한 경막하 출혈일 수도, 파킨슨병의 시작일 수도, 또는 약물 부작용이나 대사성 질환일 수 있다. 이러한 병리학적 원인들은 고도의 환원론적 분석과 전문적인 진단 도구를 통해 들여다보지 않으면 노쇠라는 거대한 블랙박스 속에 영원히 묻히게 된다. 비환원론적 지표가 숲의 전체적인 기상을 보여준다면, 그 숲 속의 병든 나무를 찾아내어 고치는 것은 결국 정밀한 환원론적 진단 기술이다.

재택의료 대상자의 대다수는 고령층이며, 이들이 호소하는 증상의 상당수는 뇌신경계와 연관되어 있다. 어지럼증, 보행 장애, 인지 기능 저하, 연하 곤란, 배뇨 장애 등은 노인 환자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핵심 문제들이다.

이 지점에서 신경과(Neurology) 등 전문 과목의 개입은 필수불가결하다. 신경과 전문의는 증상의 원인을 신경해부학적 위치로 국소화(Localization)하고, 병태생리를 규명하는 훈련을 철저하게 받은 의사이다. 가령 ‘잘 걷지 못하는 노인’을 두고 일반적인 통합 돌봄이 낙상 방지 환경 조성과 영양 공급에 집중한다면, 신경과 전문의는 보행 패턴을 분석하여 이것이 소뇌의 문제인지, 기저핵의 문제인지, 아니면 말초신경의 문제인지 감별한다. 전자가 증상의 ‘관리’라면, 후자는 증상의 ‘규명’이다.

재택의료 현장은 병원처럼 MRI나 CT를 즉각적으로 찍을 수 없는 제한된 환경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고도의 이학적 검사(Physical Exam) 능력과 임상적 추론 능력을 갖춘 전문의가 필요하다.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환자의 눈 움직임 하나, 반사 반응 하나를 통해 뇌의 상태를 읽어내는 전문의의 진단적 통찰이 병원이 아닌 환자의 집이라는 척박한 진단 환경에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신경과 전문의가 재택의료 현장에서 자리를 지켜야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파킨슨병 환자의 관리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파킨슨병은 초기에는 약물 반응이 좋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약효가 떨어지고(Wearing-off) 이상운동증이 생기며 거동이 급격히 어려워진다. 이 시기가 되면 환자는 더 이상 다니던 상급종합병원의 신경과 외래를 직접 할 수 없게 된다. 보호자가 대리 처방을 받아 약물 치료를 간신히 유지하는 게 현실이다. 

중요한 점은 파킨슨병 환자들은 거동이 불가능할지라도 인지 기능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명료한 정신을 가지고 있기에 요양병원이나 시설 입소를 극도로 꺼리며, 익숙한 집에서 지내기를 원한다. 환자는 상태 변화에 따라 세밀한 약물 조절(Fine-tuning)을 받아야 하는데, 환자를 직접 보지 못하는 대리 처방이나 비전문가의 방문 진료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단순 약물 처방을 넘어 일상생활 동작 훈련, 물리치료, 작업치료, 운동교육 등 포괄적인 관리가 집으로 직접 들어가야 환자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 의학적 난도가 높고 재택 돌봄 수요가 절실한 파킨슨병 환자군은 신경과 전문의가 이끄는 재택의료팀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환원론과 비환원론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재택의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병원의 과도한 분절화를 지양하는 통합적 태도와 질병의 원인을 끝까지 파고드는 전문적 깊이가 공존해야 한다. 따라서 재택의료팀이 포괄적인 관리를 이어가는 역할과 노인성 질환의 병태생리를 꿰뚫어 보는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전문의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경제적, 제도적 보상 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 

환자가 가진 증상을 ‘노인이라서 으레 있는 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의학적 원인을 날카롭게 찾아낼 때, 비로소 재택의료는 집에 있는 환자에게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숲 전체를 조망하면서도 동시에 병든 나무를 정확히 지목하여 치료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재택의료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