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관이 건강보험 환자의 진료비 청구 시 해당 환자에게 시행한 비급여 내역을 모두 제출하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현재 운영 중인 비급여 보고 제도는 일부 항목과 일부 기관에만 적용되고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비급여 의료비 관리가 사실상 방치되면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급증하고 있다는 문제의식도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현행 체계로는 비급여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며 정부가 비급여 시장을 ‘정확히 보고, 제대로 관리할’ 제도적 기반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학과 교수는 8일 보험연구원이 개최한 ‘공·사 건강보험 상생을 위한 정책과제’ 세미나에서 “비급여 항목이 통제되지 않으면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정부가 급여 확대를 위해 매년 재정을 투입하고 있지만, 비급여 관리 부재로 건강보험 보장률이 여전히 60% 초반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지난 35년(1990~2025년) 동안 건강보험료율은 3.1%에서 7.1%로 두 배 이상 올랐는데도 보장률은 63% 안팎에서 사실상 정체돼 있다”며 “국민은 강제보험인 건강보험에 가입해 매달 적지 않은 보험료를 내지만, 실제 진료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비급여 비용 때문에 큰 경제적 부담을 안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진료기준이 없는 비급여는 의료기관이 가격과 진료량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어 편차가 크고, 이로 인해 환자의 총 의료비 부담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민단체 경실련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비급여 진료비 공개 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경막외 신경 성형술은 의료기관별 가격 차이가 최대 19배, 도수치료는 최소와 최대 가격이 603배, 체외충격파 치료는 약 23배의 격차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에서도 동일 항목임에도 평균 10배 수준의 가격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OECD 국가 중 한국만이 공보험 환자에게 공공기관의 관리 없이 비급여 진료를 사실상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다”며 “급여 진료와 비급여 진료가 함께 이뤄지는 혼합(병행)진료는 건강보험 보장 기능과 공적 체계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현행 비급여 보고제도가 크게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병원급은 연간 2개월분, 의원급은 1개월분만 제출하면 된다. 보고 항목도 제한돼 있다. 보건복지부가 추진해 온 △건강보험 환자 진료비 실태조사(2004년) △비급여 상세내역 조사(2015년) △비급여 보고제도(2023년) 역시 표본과 항목 제한으로 실태 파악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정확한 데이터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정책 수립이 불가능하다”며 “하지만 관련 제도 개선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김 교수는 비급여 보고 범위의 전면 확대를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의료기관이 건강보험에 환자 진료비를 청구할 때 해당 환자에게 시행된 모든 비급여 내역을 함께 제출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의료기관 전산 시스템에는 비급여 정보가 이미 모두 입력돼 있으며, 현재는 오히려 건강보험 청구 과정에서 비급여를 제외하는 절차를 한 번 더 거치고 있다”며 “비급여 내역을 그대로 제출하도록 하면 정부가 모든 비급여 실태를 파악해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는 근거 자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비급여가 실손보험과 직접 연관돼 있는 만큼, 보건복지부와 금융위원회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비급여 관리위원회’ 신설도 제안했다. 그는 “금융 및 보건 당국 간 정보교환 시스템과 사후 검증 체계를 구축해 관리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사회보험을 운영하는 해외 국가들은 공보험 환자에게 제공되는 비급여의 종류와 가격을 정부가 엄격히 관리하며, 임의로 시행되는 비급여는 법적으로 처벌한다”며 “우리나라 비급여 진료의 무분별한 이용은 지속적으로 국민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키고, 건강보험 재정 누수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으므로, 근본적인 개선이 시급하다”고 힘줘 말했다.
이날 안철경 보험연구원 원장은 환영사에서 “현재 약 3500만명이 가입한 실손보험은 연간 지급보험금이 15조2000억원, 보험료 수입이 16조3000억원에 달하는 매우 큰 시장이며, 손해보험사 지급보험금의 약 40%를 차지할 만큼 영향력이 크다”면서 “이 제도가 사회와 산업을 위해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설계와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한주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은 축사에서 “공·사보험은 긴밀히 연결된 구조여서 한쪽의 부담이 커지면 곧바로 다른 쪽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다”며 “공보험과 민영보험을 대립적 구도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공보험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보장을 담당하고, 민영보험은 그 틈새를 합리적으로 보완해 두 제도가 함께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는 균형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부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