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바탕 위 노란색으로 ‘대장동’ 글씨가 한가운데 진하게 박혀 있다. 주변에는 ‘조작기소·집단항명’, ‘몸통’, ‘일당’, ‘먹튀’, ‘범죄자’ 같은 단어 조각이 펼쳐져 있다. 지난달 21일 서울 영등포·관악·강남 일대를 5시간 동안 돌며 수집한 정당 현수막 75장에서 단어를 추출했다. 각 단어에 투명도 효과를 넣어 레이어합성(여러 겹으로 덧대는 기법)했다. 반복되는 횟수가 잦을수록 농도가 진하게 드러나는 구조다. 거리에서 반복 노출된 정치 단어의 ‘농도’를 시각화했다.
정당하게 내걸리는 혐오 현수막
이른바 ‘혐오 현수막’ 논란이 다시 정치권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2022년 옥외광고물법 개정으로 정당은 통상적인 정치 활동을 위한 현수막 설치 시 허가·신고·수량 제한을 적용받지 않는 예외를 인정받았다. 정당 활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도심 곳곳에 정당 현수막이 상시로 걸리면서 시각 공해와 혐오 표현 논란이 커졌다. 2024년 개정에서 행정동별 2개 이내, 게시 기간 15일 이내 등 설치 기준이 다시 도입됐다. 그럼에도 정당 현수막은 여전히 주요 도로와 교차로에서 시민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18일부터 혐오·비방성 문구가 포함된 현수막을 ‘금지 광고물’로 분류하는 가이드라인을 시행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역시 정당 현수막을 규제 대상에 다시 포함하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정당 활동 보장을 위해 열어준 예외 규정이 여야 간 ‘혐오 표어’ 경쟁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다.
기능 잃은 정당 현수막, 시민들 정치 참여 의지에 악영향 미쳐
이번 취재에서 수집한 현수막 75장에서 중복된 문장을 제외한 67개 문장을 추출해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눠 비중을 계산했다. ‘정치 쟁점 및 상호 비방’이 35개(52.2%)로 절반을 넘겼다. ‘정책 선전 및 성과 홍보’와 ‘절기 및 기념일’은 각각 10개(14.9%), ‘정치인 동정 및 집회’는 8개(11.9%)에 그쳤다. ‘사회 비판 및 기타’는 4개(6%)로 나타났다.
정당 현수막의 절반 이상이 여야 공방과 상호 비난 구호에 활용되고 있으며, 정책·민생·응원 성격의 표현은 전체의 3분의 1 남짓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러한 비방 문구가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시민들의 정치 참여 의지를 저해하고, 건강한 공론장 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유성진 이화여대 스크랜튼학부 교수(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장)는 “정당 현수막은 원래 정당이 갖고 있는 공약이나 유권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인데,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라면서 “시민들이 이런 부정적 표현에 반복 노출될 경우 정치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떨어지고 정치 혐오가 심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이어 “메시지를 던지는 주체도 중요하다. 적어도 사회적 신뢰를 얻고 있는 정당이라면 혐오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날 수집한 현수막에는 문장뿐 아니라, 실존 정치인의 얼굴을 활용한 공격적 이미지도 포함돼 있었다. 눈을 테이프로 가리거나 얼굴을 과장·왜곡한 사진을 인쇄해 별칭과 문구를 더한 식이다. 특정 정당이나 인물을 지지·반대하는 표현을 넘어, 인격을 조롱하거나 혐오를 유발하는 그림이 거리 한복판에 그대로 노출됐다.
각인하는 언어, 취약한 시민일수록 깊이 박힌다
이번 취재에서 수집한 현수막 75장을 단어 단위로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대장동’(30회)이었다. ‘조작기소’, ‘집단항명’, ‘일당’은 각각 9회씩, ‘먹튀’, ‘국기문란’, ‘범죄자’ 등 부정적 표현도 여러 차례 반복됐다. 이런 단어들은 사실 관계를 설명하기보다 특정 인물·집단을 부정적 이미지로 압축해 각인시키는 기능을 한다. 한 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을 생략하고 ‘대장동=범죄’라는 단순한 구도가 성립된다. 특히 정치에 관심이 적거나 정보 접근이 어려운 시민일수록 비판적 검증보다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위험이 크다는 것이 사회언어학계의 우려다.
박경래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명예교수는 “이런 현수막 문구는 사실을 설명하는 언어라기보다 특정 집단을 겨냥한 선전용 구호에 가깝다”며 “소득·재산·학력 수준이 낮고 정보 접근이 어려운 계층일수록 비판적으로 걸러 읽기보다는 반복 노출된 구호를 그대로 학습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이어 “한 번 각인된 이미지는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만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현수막 매체의 경우 더욱 조심스럽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림역에는 7개, 역삼역에는 1개
혐오 표현이 특히 집중된 곳은 관악구 신림역 일대였다. 신림역 교차로에는 정당 현수막이 한때 7개까지 동시에 걸려 있었다.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직장인 조한주(32)씨는 “출근 때마다 비방이나 과장된 자랑 문구를 보게 되지만,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없다”며 “대장동 얘기보다 이 지역에 청년이 많다면 청년 주택이나 의료 같은 민생 정책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시민이 체감하는 정치 혐오의 피로감을 드러낸 대목이다.
비슷한 시각 강남구 역삼역 교차로는 상반된 풍경을 보였다. 상시 유동인구가 많은 대형 교차로지만, 정당 현수막은 1개에 그쳤다. 강남구는 옥외광고물법 개정 이후에도 정당 현수막을 동별 2개 이내로 관리하는 조례를 운영해 왔다. 지난 4월에는 현장에서 위치·정당명·설치 기간을 입력하면 개수 제한과 기한 위반 여부를 자동으로 확인하는 ‘정당 현수막 실시간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구에 따르면 시스템 가동 이후 주요 간선도로에서 관련 민원이 눈에 띄게 줄었다.
민생을 위한 정치의 언어를
정당·정책을 연구하는 시민사회단체와 전문가들은 정당 현수막이 본래 시민에게 정책을 알리고 정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현재는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메시지 중심으로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이번에 분석한 현수막 75장은 예외 규정으로 사실상 관리 밖에 놓인 정당 현수막이 혐오·비방 언어의 확산 통로로 기능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당 현수막을 다시 규제의 범위에 포함하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를 앞둔 가운데, 정당 스스로 혐오·비방 표현을 자제하는 자율 규범을 세우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정치 혐오와 무관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