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엔비디아의 고성능 인공지능(AI) 칩 ‘H200’의 대중(對中) 수출을 조건부 허용하면서 한국 반도체 업계가 복잡한 셈법에 들어갔다. 중국향 물량 일부가 풀리며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증가가 예상되지만, 미국이 부과한 ‘25% 통행세’가 국내 기업에 단가 압박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일(현지시간) 미국 정부 관료를 인용해 “중국으로 향하는 H200은 대만 TSMC에서 생산된 뒤 미국 본토에서 국가안보 심사를 거쳐 중국으로 재수출되는 방식으로 운용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가 수출 허용과 통제를 동시에 거는 ‘우회적 관리 체계’를 택한 셈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H200 수출을 허용하겠다고 통보했다”고 밝힌 데 따른 후속 절차다. 다만 판매액의 25%를 미국 정부에 지불해야 하고, 중국 등 승인된 고객에만 공급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였다.
H200은 기존 중국 전용 저사양 모델 ‘H20’보다 성능이 2배 이상 향상된 고사양 AI 칩으로, 칩 한 개당 5세대 HBM(HBM3E) 6개가 탑재된다. 다만 엔비디아의 최상위 제품군인 블랙웰과 루빈보다는 한 단계 아래 급이다.
블랙웰과 루빈은 이번 완화 조치에서 제외돼 중국 수출이 계속 금지된다.
HBM 물량은 늘지만…“25% 관세, 한국에 단가 압박 돌아올 수도”
국내 반도체 업계는 단기적으로는 긍정적인 신호로 보고 있다. H200에 탑재되는 HBM3E는 대부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9일 보고서에서 “엔비디아 HBM3E 물량의 90%는 SK하이닉스가 공급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중국향 H200 수출 재개는 SK하이닉스의 추가 주문 증가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삼성전자 역시 HBM4를 중심으로 생산 능력을 확대 중이어서 중장기적으로 수혜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차세대 ‘블랙웰 울트라’와 ‘루빈’에 HBM3E 12단을 단독 공급하기로 한 상황이어서, 추가 H200 추가 주문 발생 시 단기 실적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업계 전반의 분위기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쪽에 가깝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모두 2025년 HBM 물량이 사실상 완판된 상황으로, 중국 수요가 급증하더라도 공급 여력은 크지 않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부분은 엔비디아가 부담해야 할 ‘매출 25% 관세’가 납품 단가 인하 요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HBM은 AI 칩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엔비디아의 원가 부담이 국내 업체에 직접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중국, 내부 통제 강화…“H200 쓰려면 이유 설명하라”
중국의 대응 역시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최근 H200을 구매하려는 기업에 대해 △내부 승인 절차 도입 △국산 칩으로 대체 불가능한 사유 제출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또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와 공업정보화부(MIIT)는 공공부문에서 H200 사용을 제한하거나, 국산 칩 우선 사용 원칙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중국 정부는 2025년 하반기 엔비디아 H20에 대해서도 ‘백도어 위험’을 이유로 사용 자제를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H200 수출 길이 열리더라도 중국 내 실제 수요는 시장 기대보다 제한적일 수 있다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더 근본적인 변수는 중국의 ‘AI 반도체 개발 속도’다. 중국 화웨이는 이미 자체 AI 칩 ‘어센드(Ascend)’ 시리즈로 엔비디아 A100·A800 대비 80~90% 수준의 성능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올해 출시한 어센드 910C는 H100급 성능에 근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파운드리 SMIC는 미국의 극자외선(EUV) 장비 반입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7나노 공정 양산을 시작했고, 내년 생산 능력을 2배 늘릴 계획이다.
'절충안' 최종 승자는 누구?…“한국은 HBM4·공급망 다시 짜야”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를 두고 “블랙웰 수출 전면 허용과 AI칩 전면 허용 사이에서 나온 절충안”이라고 평가한다.
FT와 블룸버그 등 외신은 이번 조치를 두고 “강경한 수출 규제가 오히려 중국 토종 기업의 기술 개발을 자극했다는 평가가 미국 내에서 제기돼 왔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H200만 선별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으로 선회했다고 분석했다. 즉, 첨단 칩은 계속 통제하되 일정 수준의 공급을 열어 중국의 자립 속도를 조절하고 미국 기술 의존도를 유지하려는 전략적 선택이라는 해석이다.
일각에서는 엔비디아가 내년 출시할 ‘루빈’에 앞서 H200 재고를 중국 시장에 털 수 있게 된 만큼,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최대 수혜자라는 말도 나온다.
젠슨 황 CEO는 그동안 “과도한 수출 규제가 중국의 AI 칩 독립을 오히려 가속할 수 있다”며 완화 필요성을 피력해 왔다. 엔비디아는 이번 결정에 대해 “미국 AI 칩 산업의 경쟁력 유지에 도움이 되는 조치”라며 환영 입장을 밝혔다.
반면 미국 내에선 “H200도 고성능 칩이기 때문에 중국의 AI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비판도 거세다. 진보연구소의 알렉스 스탭은 AFP통신에 “H200은 기존 허용 칩보다 6배 강력한데, 이를 풀어주는 건 ‘엄청난 자살골’”이라고 비판했다.
국내 업계는 이번 조치를 “단기적 숨 고르기”로 보면서도, 장기적 전략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본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는 "H200 수출로 한국의 HBM 공급이 일부 늘어나겠지만, 미래를 보면 중국의 기술 추격과 미국의 새로운 규제가 동시에 다가올 수 있다”며 “지금 필요한 건 ‘특수’에 들떠 있는 게 아니라, 미·중 사이에서 우리 기술·공급망을 얼마나 주도적으로 설계하느냐를 점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