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99)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99)

구현의 문턱에서: 늙은 예술가의 고백

기사승인 2025-12-15 08:00:09
폴 세잔, 화가의 외삼촌 앙투안 도미니크 오베르(1817년 출생), 1866, 캔버스에 유채, 81.9x65.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세잔의 붓끝에서 분장한 외삼촌


1866년 가을,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에서 27살의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외삼촌 앙투안 도미니크 소베르 오베르(Antoine Dominique Sauveur Aubert)를 다양한 인물로 분장시켜 연작 초상화를 그렸다. 가운을 입고 술이 달린 푸른 모자를 쓴 모습, 수도사 복장을 한 모습, 변호사 등 매일 새로운 인물로 변신한 삼촌은 세잔의 실험 정신과 표현주의적 성격을 고스란히 담아낸 모델이었다. 한 친구는 “매일 그의 새로운 초상화가 나타났다”고 전하며, 세잔의 열정을 생생히 증언했다. 

초상화 너머의 실험과 혁신

이 시기의 세잔은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해 거칠게 짜인 캔버스에 직접 물감을 두껍게 칠했다. 이러한 기법은 그의 작품에 독특한 질감을 부여하며, “대담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연작은 1860년대 에두아르 마네의 스페인풍 회화를 연상시키며, 당시 유행하던 의상과 회화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에두아르 마네, 에스파다(Espada)의상을 입은 숙녀, 1862,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마네, 고야를 꿈꾸다

마네는 1863년, 살롱 데 레퓌제(Refuses)에 모델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을 르네상스 판화에서 차용한 포즈로 투우에 어울리지 않는 신발을 신고 분홍색 망토로, 전통을 비틀면서도 용기를 상징하는 작품을 출품했다. 스페인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고야가 투우 장면을 묘사한 시리즈를 재현하며, 마네가 스페인과 고야의 품은 경외를 드러냈다.

한 평론가는 “마네는 자유롭고 불타는 고야의 손길을 모방했다”고 평했다. 이 작품은 인물과 역사, 회화 전통을 교차 시키며 마네 특유의 도전적 시선을 보여준다. 마네는 고야를, 세잔은 마네에게 존경을 담아 그렸다.
 
폴 세잔, 예술가의 외삼촌, 수도사 옷을 입은 앙투안 도미니크 소베르 오베르, 1866, 캔버스에 유채, 65.1x 54.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팔레트 나이프의 혁명

19세기 중반, 젊은 세잔은 회화의 경계를 밀어붙였다. 그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물감 자체로 피사체를 구축하는 대담한 기법을 실험했다. 팔레트 나이프를 자유롭게 휘두르며 어둡고 밝은 형태의 층을 쌓아 올린 그의 얼굴 묘사는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잔혹한’ 방식이었다. 물감은 자잘한 크랙으로 그 깊이를 말해준다. 

엑상프로방스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은 파리에서의 수학을 거쳐, 낭만적이고 고전적인 주제를 어두운 색채와 극적인 색조 대조로 표현하는 초기 작품으로 이어졌다. 들라크루아와 쿠르베의 전통을 따르는 표현적인 붓놀림은 세잔 내면의 격정과 실험 정신을 드러낸다. 세잔이 거장으로 성장해 가면서 여러 선배 예술가의 영향을 받게 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외삼촌 오베르의 초상화는 단순한 인물 묘사를 넘어, 세잔이 예술을 통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창이다. 

폴 세잔, 도미니크 외삼촌, 1866, 캔버스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세잔이 그린 얼굴의 진실: 오베르의 초상 

미국의 3대 미술관에 속하는 보스톤 미술관에서 마침 변호사로 분한 도미니크 외삼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열 번 이상 포즈를 취했으며, 두터운 물감의 균열은 그의 강인한 존재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특히 초상화에서 인물과 배경을 연결하는 새로운 접근법은 회화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재정의했다. 그의 붓질은 단지 형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구축하는 행위였다. 

세잔은 우리가 얼굴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세잔은 쿠르베와 들라크루아를 따라 물감을 두껍게 칠하던 시절을 지나, 1874년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점차 밝은 색조를 받아들였다. 인상파 화가들의 형님 격인 카미유 피사로와의 교류는 그에게 야외작업의 세계를 열어주었고,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의 공동작업은 그의 스타일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폴 세잔, 목매단 남자의 집, 오베르쉬르우아즈, 1873, 캔버스에 유채, 55.5X66.3cm, 오르세 미술관

고독을 그린 첫 붓질

1874년, 세잔은 세 점의 풍경화를 들고 인상파 전시회에 나갔다. 극적인 서사도 인물도 없었다. 대신 단순한 길과 얼어붙은 초목이 있었다. 거친 붓질은 벽돌처럼 화면을 채웠고, 복잡한 구도는 보는 이를 길 위에 세웠다. 비평가들은 혼란스러워 했지만, 컬렉터는 그 작품을 샀다.
 
<예술가의 외삼촌>이 전시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얼굴을 읽는 시간: 세잔의 느린 초상화

세잔은 생의 마지막에 “모델을 읽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예술가에게 때로는 매우 느린 과정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의 평생에 걸친 초상화 작업을 관통하는 철학을 함축한다. 세잔은 친구, 낯선 사람, 미술계 인사들까지 다양한 인물을 그렸고, 자화상 역시 여러 차례 남겼다. 그러나 그의 초상화는 정물화나 풍경화처럼 자주 연구되지 않았고 오히려 덜 알려진 영역으로 남아 있다.
 
폴 세잔, 밀짚모자를 쓴 구스타브 부아에, 1870~71, 캔버스 위 종이에 유채, 54.9x 38.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는 세잔이 아니었다: 외형 너머의 진실

1870 년에서 1871년 보불 전쟁 중, 세잔은 양털처럼 깎인 구렛나루와 턱을 가진 사색에 잠긴 눈빛의 이 초상화를 그렸다.  20세기 초까지 많은 이들은 세잔의 자화상이라 믿었고, 나도 이 작품을 세잔인 줄 알았다. 그는 세잔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변호사였던 귀스타프 부아에(Gustave Boyer, 1840년생)이다.

세잔은 부아에를 두 차례 초상화의 모델로 삼았다. 이 캔버스의 회화적인 표면, 검은색과 회색의 자유로운 사용 그리고 대담하게 구현된 형태는 당시 세잔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세잔의 붓, 이데아를 그리다

세잔은 단순히 풍경이나 인물을 그린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철학자 플라톤처럼, 우리가 사는 현실이 불완전하다고 믿었다. 플라톤이 ‘이데아(idea)’라는 완전한 세계를 상상했듯, 세잔도 찰나의 인상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한 형태’를 추구했다.

인상주의가 빛과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 했다면, 세잔은 그 인상을 박물관에 걸릴 만큼 견고한 진실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색채는 감각을 넘어 구조를 만들었고, 그의 붓놀림은 자연을 해석하는 철학적 도구였다.

세잔의 초상은 그 철학의 결정체다. 단순한 인물 묘사를 넘어, 세잔이 현실 너머의 진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창이다. 이 초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보는 것이 정말 진실인가?” 예술은 때로 보는 이의 시선을 시험한다. 

폴 세잔, 커피포트와 함께 있는 여인, 1895년경,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오르세 미술관 

정물처럼 앉은 여인


1890년대 중반, 세잔은 인상주의를 넘어선 ‘형태’와 ‘질서’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커피포트와 함께 있는 여인>은 그 전환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모델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엑상프로방스의 자 드 부팡(Jas de Bouffan) 가족 저택에서 일하던 직원 중 한 명일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인물은 주체가 아니다. 그녀는 정물처럼 앉아 있다. 

파란색으로 묶인 세계: 세잔의 색채 통일의 실험

테이블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고, 커피포트는 정면에서, 찻잔은 위에서, 벽은 오른쪽 위에서 바라본 시점이다. 이처럼 뒤섞인 다시점은 사물들을 불안정하게 만들지만, 세잔은 색채로 이를 통일한다. 부인의 옷에 칠한 파란색은 얼굴의 그림자, 벽, 커피포트 외곽선에 반복되며 화면 전체를 하나의 질서로 묶는다. 

입체주의의 문을 두드리다

세잔은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로 환원하라”고 말했듯, 이 초상화를 정물처럼 접근했다. 부인의 머리는 구, 팔은 원기둥, 몸은 원뿔로 수렴된다. 그는 인물의 심리보다 형태의 본질에 집중했고, 그 결과 이 그림은 인물화이면서도 정물화의 질서를 갖춘다. 커피포트, 찻잔, 테이블 그리고 몸은 수평과 수직의 구획 속에서 단순화되고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된다.

구현의 문턱에서: 늙은 예술가의 고백​ 

예술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마음속의 이상을 눈앞에 구현하는 것이다. 늙어버린 세잔은 말한다. 

“나는 아마도 도달하겠지. 그러나 너무 늙었어.” 

예술은 독창성과 모방 사이에서 흔들린다. 모방은 대중을 만족시키고, 독창성은 예술가를 흥분시킨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교감, 창조의 진정성 그리고 예술 법칙과의 밀접한 관계다. 예술은 완성되지 않으면 이해 받지 못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오늘도 구현을 꿈꾼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 작가
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홍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