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A씨는 지난해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증상이 악화돼 결국 요양원에 모셨지만, 곧바로 또 다른 현실과 마주했습니다. 아버지 명의 계좌에는 예금이 충분했지만, 자녀인 A씨가 그 돈을 자유롭게 인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A씨는 “매달 요양원비를 내야 하는데 통장에서 돈을 뺄 수 없어 막막했다”고 토로했습니다.
이처럼 치매 진단 이후 ‘돈은 있는데 쓰지 못하는’ 상황을 겪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치매머니’입니다. 치매머니는 치매 환자가 보유한 금융·실물 자산을 말합니다. 예금, 주식, 보험, 부동산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치매에 걸렸다고 자산 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지 능력이 저하됐다고 금융기관이 판단하면 거래가 제한되거나 자산 처분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자녀라도 부모의 계좌에서 마음대로 돈을 인출할 수 없습니다. 아직 상속이 개시된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는 ‘본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치매머니를 ‘묶인 돈’, ‘죽은 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현재 국내 치매머니 규모는 약 170조원으로 추산됩니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약 7%에 해당하는 거액입니다. 2050년에는 치매머니가 488조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돈은 있지만 돌지 않는 구조. 개인의 문제를 넘어 경제적 부담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해법으로 떠오른 ‘치매 신탁’…보험사도 적극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권이 제시하는 해법이 ‘치매신탁’입니다. 신탁은 쉽게 말해 “믿고 맡긴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자산을 금융회사에 맡기고, 내가 정한 목적에 맞게 관리하도록 계약하는 구조입니다.
치매신탁은 치매 발병 전 미리 계약을 맺어 두는 상품입니다. 이후 치매 진단으로 의사 능력이 떨어질 경우, 사전에 정한 방식대로 자산이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지급청구대리인으로 지정해 병원비와 간병비만 인출되도록 설계할 수 있습니다. 생활비는 월 일정 한도로 제한하고, 의료비는 증빙 서류에 맞춰 지급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사후에는 미리 정해둔 비율대로 자산을 상속하도록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즉 판단 능력이 약해진 이후에도 재산이 본인의 의사에 맞게 관리되도록 하는 ‘안전 장치’인 셈입니다.
그동안 치매신탁 시장은 은행권이 주도해왔습니다. 최근에는 보험사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교보생명입니다. 지난해 선보인 ‘평생안심신탁’은 평상시에는 일반 계좌처럼 자유롭게 사용하다가, 치매나 중증질환 등으로 인지 능력이 저하됐다고 의료적으로 판단되면 사전에 지정한 후견인이 자산을 관리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출시 한 달 만에 100호 계약을 돌파하는 등 관심도 높습니다.
다만 치매신탁은 반드시 ‘발병 전’에 가입해야 합니다. 이미 치매가 진행된 이후에는 계약 체결이 사실상 어렵습니다. 타인이 임의로 계약을 변경하거나 해지하는 것도 제한됩니다. 수수료와 최소 가입 자산 기준 역시 따져볼 요인입니다.
풀어야 할 과제 산적…정부도 ‘치매머니 관리 강화’ 과제로
치매신탁이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아직 만능 해결책은 아닙니다. 현재는 고령자가 보유한 자산 가운데 예금 등 현금성 자산 위주로만 신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치매머니의 74% 이상은 부동산(약 113조원)입니다. 특히 주택은 담보대출이 설정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현행 자본시장법상 ‘채무’가 신탁 재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대출이 남아 있는 집은 신탁으로 맡기기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대출이 전혀 없는 주택이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도 개선 없이는 신탁의 활용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연금과 보험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금은 수급권의 제3자 이전이 제한돼 있어 신탁에 넣기 어렵습니다. 보험금 역시 일부 생명보험금에 한해 신탁이 허용돼 치매보험금 등은 활용이 쉽지 않습니다. 이영경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치매머니 관리를 위한 신탁 활용’ 보고서에서 “예금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부동산, 연금, 보험 등 고령층 주요 자산을 신탁에 편입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언하기도 했습니다.
정부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치매 발병 전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신탁 재산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금융위원회 역시 올해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치매머니 관리 강화를 제시했습니다. 내 돈이 필요할 때 쓰지 못하는 ‘그림의 떡’이 되지 않도록, 치매신탁과 관련 제도 개선 논의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주목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