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제약·바이오산업은 거대한 전환기에 서 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신약 개발이 본격화되고, 희귀질환과 항암제를 중심으로 파이프라인이 재편되면서 플랫폼 기술이 경쟁력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임상 경쟁의 무게추는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은 글로벌 임상 점유율 6위로 밀려났고, 도시별 순위에서도 베이징에 선두를 내줬다. 산업 전략, 규제 환경, 인프라 전반의 점검이 필요한 때다. 4편에 걸쳐 글로벌 신약 개발의 최신 흐름을 짚고, K-바이오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
글로벌 제약·바이오산업의 연구개발(R&D) 축이 ‘미충족 의료 수요’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완치가 어렵거나 치료 옵션이 제한적인 병의 항암제와 희귀질환 치료제가 차세대 파이프라인으로 부상하면서 단순한 시장 확대를 넘어 의학적·사회적 가치까지 동시에 겨냥한 전략이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빅파마부터 바이오텍까지 경쟁적으로 고위험·고부가가치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그동안 화학 합성 기반의 저분자 화합물이 의약품 시장을 주도해왔으나, 바이오의약품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등장하면서 단일클론항체, 항체약물접합체(ADC), 이중항체, CAR-T(키메라 항원 수용체 T세포·카티), 유전자 치료제 등 다양한 모달리티의 치료제가 차세대 파이프라인으로 개발되고 있다.
국산 신약 파이프라인에서도 바이오 신약 비중이 크게 늘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KHIDI)의 ‘국내 신약 25년의 이정표와 블록버스터의 탄생’ 보고서를 보면, 2024년 기준 국내 신약 파이프라인 1701개 가운데 바이오신약이 850개(50%)로 가장 많았다. 파이프라인 유형도 저분자, 세포·유전자치료제(CGT), 항체치료제, 재조합 단백질, 핵산, 표적 단백질 분해제(TPD) 등으로 다양해졌다.
KHIDI 연구진은 보고서를 통해 “혁신적 바이오의약품은 글로벌 시장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며 “결국 새로운 모달리티 확산은 제약기업의 R&D 전략뿐 아니라, 향후 규제와 국가 바이오헬스 정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짚었다.
희귀의약품 시장 확대…FDA 승인 신약 60% 차지
차세대 치료제로 떠오르고 있는 분야는 면역항암제와 희귀질환 치료제다. 면역항암제는 적응증 확장을 통해 시장을 재편했으며, 희귀질환 치료제는 대형 질환 중심에서 점차 세분화되고 있다.
그동안 희귀질환 치료제는 미충족 의료 수요와 필요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유병률이 낮아 수익성이 보장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적극적인 연구개발과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시장 실패 영역’으로 간주돼왔다. 그러나 각국의 여러 인센티브 제도에 힘입어 희귀의약품 시장은 2020년 이후 제약사들이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확보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장으로 부상했다.
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분석 전문기관 이밸류에이트(Evaluate)의 ‘2024 희귀의약품 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 희귀의약품 시장 규모는 2024년 기준 1850억달러(한화 약 270조8000억원)에서 2028년에는 약 2700억달러(395조28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신약개발사업단(KDDF)에 따르면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분류(ICD-11)에 등록돼 있는 희귀질환은 5500여종이며, 특정 증상이 보고된 사례들까지 합하면 8000여종에 이르는 희귀질환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환자 수 자체가 많지 않아 임상이 까다롭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율은 높다. 지난 2023년 FDA 승인 신약의 60%는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받았다.
이 같은 흐름은 단순히 시장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과거 빅파마의 전략은 대중적인 만성질환 중심의 블록버스터 창출에 맞춰져 있었지만, 최근엔 규제 환경 변화와 사회적 요구, 기술 혁신이 맞물리며 연구개발의 방향성이 미충족 의료 수요를 확충하는 길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에서도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국가신약개발사업 등을 통해 희귀질환 분야 연구를 전략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와 함께 건강보험 급여 체계 내에서 고가 희귀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산업 구조 측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대형 제약사들은 자체 연구보다는 유망 바이오텍과의 기술이전, 인수합병(M&A), 공동연구를 통해 파이프라인을 확충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초기 연구는 바이오벤처가 담당하고, 후기 임상과 상업화는 빅파마가 주도하는 분업 구조가 공고해지고 있다. 이는 혁신의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개발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방식으로 평가된다.
신약 시장 구조적 전환…“규제 변화 필요”
전문가들은 지금의 변화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이라고 진단한다. 미충족 의료 수요가 높은 영역일수록 의학적 가치와 사회적 요구가 크고, 규제 인센티브와 기술 혁신이 맞물리면서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병철 법무법인 세종 고문은 “오스코텍과 제노스코, 유한양행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는 국내 바이오텍과 전통 제약사가 각자의 강점을 결합해 글로벌 신약 개발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며 “이러한 협업 모델이 반복적으로 만들어질 경우 한국형 신약 혁신 생태계는 보다 단단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는 초기 단계 기술이전에 머무르던 기존 전략을 넘어, 국내 역량을 기반으로 글로벌 신약을 상업화하는 성공 모델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남은 과제도 적지 않다. 암과 희귀질환 특성상 임상시험 참여 환자 모집의 어려움, 초고가 치료제의 보험 재정 부담, 장기 효과에 대한 근거 부족 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지적된다.
혁신 신약 개발을 통해 미충족 의료 수요를 채우기 위한 규제 당국의 변화도 필요하다. 이종혁 중앙대 약학대학 교수는 “인공지능(AI)이 확대되면서 규제 당국의 심사기준은 기존의 임상시험 결과의 통계적 유의성을 중시하는 방향에서 AI 모델의 재현성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심사 패러다임이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며 “규제기관은 대규모 임상 관련 빅데이터를 AI를 활용해 분석하는 등 규제의 효율성을 높이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결국 시판 승인에 집중된 전통적 규제가 개발-허가-시판-시판 후 평가가 모두 연계되는 전주기 규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