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109)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109)

서전트는 <엘 할레오>에 플라맹코의 격정과 황홀을 담았다!

기사승인 2026-02-23 09:26:28 업데이트 2026-02-23 13:08:36
존 싱어 서전트, 엘 할레오, 1882, 캔버스에 유채, 237x 352cm, 이사벨라 가드너 미술관, 보스턴

존 싱어 서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엘 할레오El Jaleo>는 스페인 집시 무용수가 음악가들의 반주에 맞춰 춤추는 장면을 담은 대작이다. 1882년에 완성된 이 그림은 현재 매사추세츠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Isabella Stewart Gardner, 1840~1924)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888년 보스턴에서 공개 전시된 뒤, 토마스 제퍼슨 쿨리지(Thomas Jefferson Coolidge)가 이 작품을 구입했는데, 인척인 그는 언젠가 이 그림을 이사벨라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1914년, 이사벨라는 <엘 할레오>를 빌려와 특별히 스페인 회랑을 지어 전시했다.

작품 앞에는 가리비 모양의 시멘트 아치형 통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이베리아 반도의 히스패닉–모스크(Hispano-Moresque) 양식을 연상시키며, 대리석 우물과 기둥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두 개의 남부 이탈리아산 대리석 동물상이 그림을 받치듯 마주보며 놓여 있고, 왼쪽 벽면에 세워진 큰 거울은 작품을 반사 시키며 공간감을 더한다.

그러나 그림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만든 구조로 1미터 이상은 떨어져 감상할 수밖에 없어 몹시 안타까웠다. 미술관 설립자인 이사벨라 가드너는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전시물을 현 상태로 유지하기를 원했다. 작은 미술관이라 촘촘하게 경비원을 둘 수 없고 대형 도난사건의 현장이었던 미술관의 고충을 엿볼 수 있었다. 휴일이라서 미술관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스페인 회랑에 관람객이 몰려, 이사벨라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다른 전시관을 둘러본 후 감상할 수 있었다. 

다행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서전트의 파리 시절 전시회에서, 초기 대표작인 <스페인 춤>, <옥상의 카프리 소녀들>, <카프리의 올리브나무 아래서>를 보고 이곳에서 <엘 할레오>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존 싱어 서전트, 엘 할레오(El Jaleo), 1882, 캔버스에 유채, 237x 352cm, 이사벨라 가드너 미술관

1878년부터 1882년 사이에 제작된 서전트의 살롱 작품은 파리에서 만난 스승 카를로스 듀란(Carolus Duran)의 영향을 받은 여행 회화에 속한다. 이 그림은 빛과 그림자, 음악과 열정이 뒤섞인 소용돌이를 통해 서전트와 이사벨라가 스페인에서 경험한 플라멩코 공연의 황홀한 분위기를 담아낸다. 중앙 무용수 팔의 독특한 뒤틀림과 의상에 달린 깃털에서 반짝이는 선명한 녹색은 음악이 내뿜는 격정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이사벨라는 무용수의 흰 새틴 치마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과, 뒤쪽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강렬한 조명을 고려하여 그림 아래에서 비추는 새로운 조명을 설치했다. 또한 그림 왼편 벽에 거울을 두어 장면을 확장시키고, 무대의 네 번째 벽을 허물어 관람자가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몰입을 느끼도록 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이질적인 거울이 오히려 감상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로 다가온다고 느껴졌다. 

쿨리지는 이사벨라가 마련한 웅장한 전시 공간을 보고 결국 <엘 할레오>를 박물관에 기증할 수밖에 없었다. 서전트는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전시된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하여, 이사벨라에게 준비 과정에서 만든 데생 앨범과 초기 플라멩코 녹음 자료를 선물했다. 그렇다면 이사벨라는 동굴에서 공연을 보았고 그 연장선을 구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엘 할레오> 부분

서전트는 1879년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5개월간 여행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이 여정에서 그는 작은 유화 <스페인 춤>(미국 히스패닉 협회)도 남겼다. 서전트는 검정과 흰색을 섬세한 질감과 풍부한 볼륨으로 표현하는 데 뛰어난 화가였다. 무용수가 흰색 스커트를 움켜쥔 팔을 따라 빛이 흘러 그녀의 턱과 뺨을 스치며, 아래에서 비추는 조명은 그림자를 증폭시켜 일렁이는 극적인 장면을 만든다.

배경 속 연주자들 역시 음악의 절정에 몰입해 고개를 뒤로 젖히거나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그들의 몸과 그림자는 뒤섞여 어디까지가 실체이고 어디까지가 그림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존 싱어 서전트, 스페인 춤, 약 1879~82, 캔버스에 유채, 히스패닉 협회, 뉴욕
 
서전트는 음악적 재능을 지닌 화가로, 스페인 여행 동안 현지 음악에 깊이 매혹되어 악보를 모으고 연주자들을 스케치했다. 그는 귀국 후 여러 차례 친구들을 초대해 스페인 음악과 작품을 소개하는 낭송회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결국 선술집 <엘 할레오> 속 플라멩코 무용수들을 그린 기념비적 작품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무용 장면은 실제 공연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서전트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무용수들의 자세를 새롭게 구상하거나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연의 감각적 체험을 화면 속에 담아냈다. 불꽃처럼 번쩍이는 빛과 어둠 속에서 춤추는 무용수들의 극적인 몸짓은 음악의 강렬한 리듬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존 싱어 서전트, 옥상의 카프리 소녀들, 1878, 캔버스에 유채, 크리스탈 브리지스 미국 미술관, 아칸소주 벤턴빌

연대기로나 주제로 볼 때, <엘 할레오>는 서전트가 베니스에서 제작한 일련의 그림들과 연결된다. 그 작품들 역시 강렬한 조명 효과, 이국적인 모델, 절제된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로마니(Romani) 춤의 화려한 의상과 연극적인 연출에 깊은 인상을 받은 서전트는 파리로 돌아와 공연 무대를 연상시키는 <엘 할레오>를 대형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다. 

로마니 사람들은 원래 북인도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각 지역의 음악과 춤에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플라멩코가 그렇다.  

<엘 할레오> 부분

거의 3.7미터에 달하는 너비의 <엘 할레오>는 오른쪽의 붉은색과 왼쪽의 주황색 포인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단색조로 넓게 칠해져 있다. 이러한 색채 구성은 에두아르 마네가 대형 작품 속에 레몬을 배치했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파리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서전트는 강렬한 조명 아래 빠른 붓질로 무용수의 빛나는 흰 치마와 짙은 검은색 사이의 극적인 대비를 표현했다..

전형적인 플라멩코 의상인 화려한 자수 숄을 어깨에 두른 무용수는 캔버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진하는 구도이다. 왼팔을 뻗은 무용수의 양식화 된 자세는 최소 1년 이상 철저한 준비 끝에 탄생하였고, 자신감 넘치는 빠른 붓질이 두드러진다.  

존 싱어 서전트, 카프리의 올리브나무 아래서, 187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서전트는 주요 전시회 출품작에 대한 영감을 얻고자 카프리로 향했다. 카프리 섬은 산업화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상징하는 이상향이다. 그는 카프리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의 후손이므로, 친구의 현지 모델인 로시나 페라라(Rosina Ferara)를 고용했다. 서전트는 그녀를 오래된 올리브나무의 비틀린 가지에 기대게 만들어 고대와 연결했다. 1879년 그는 이 ‘지중해 목가’를 스승 카를로스 듀란의 초상화와 함께 파리 살롱에 출품해 큰 호평을 받았다.

<엘 할레오>는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문화에 대한 매혹을 보여주는 ‘히스패니즘’의 대표적 사례다. 미국인 부모에게서 피렌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목민 유전자로 평생 떠돌며 살았다. 

유럽에서 활동한 미국 인상주의 화가로 <마담 X>로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메트로폴리탄의 서전트 전시회 이후 만난 이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쉽사리 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 읽었던 '자유의 벗' 속 플라멩코 무용수의 사진은 내게 강렬한 갈망을 심어 주었다. 그 기억은 세월을 지나 그라나다에서 마주한 열정적인 공연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서전트의 <엘 할레오> 앞에서 정점을 찍었다. 무용수의 격정적인 몸짓과 관객들의 긴장된 시선, 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극적인 대비는 단순한 장면을 넘어선 예술적 체험이었다.

서전트의 붓끝은 스페인의 문화와 열정을 회화로 번역해냈다. 그 앞에서 나는 예술이 어떻게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는지, 그 힘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 작가
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