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에 제동을 걸면서 글로벌 통상 불확실성이 일부 완화됐다. 이에 주말 사이 미국 증시가 동반 상승 마감한 가운데 국내 증시도 반도체 대형주를 중심으로 강세를 보였다. 다만 시장에서는 관세 정책의 방향이 바뀌고 있을 뿐, 한국 경제의 통상 환경이나 펀더멘털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증시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관세 시대의 종료’라기보다 관세 구조의 ‘변화’에 가깝다고 진단한다. 관세 불확실성이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지만, 글로벌 정책 변수의 큰 방향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국내 주식시장의 관심은 관세 이슈에서 기업 실적과 업황 회복 가능성으로 이동하는 흐름이라는 설명이다.
23일 한국거래소(KRX)에 따르면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0.65%(37.56포인트) 오른 5846.09에서 거래를 마쳤다. 장 초반 사상 처음 5900선을 돌파한 뒤 외국인 순매도 규모가 확대되며 5900선 아래에서 장을 마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형 반도체주가 지수를 방어하는 가운데 일부 미국향 수출주도 동반 상승했다.
美 대법원, IEEPA 관세에 제동…대신 15% 한시 관세 등장
지난 주말 미국 대법원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Reciprocal Tariffs)’ 부과 조치에 대해 위헌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IEEPA가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은 비상 상황에서의 수입 제한이지, 포괄적인 관세율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번 판결로 IEEPA를 근거로 한 상호관세는 상당 부분 무효화됐지만 관세 자체가 즉시 없어진 것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판결 직후 IEEPA 대신 미국 무역법 122조를 근거로 새로운 글로벌 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다. 무역법 122조는 대통령이 단기간 최대 15%까지 일괄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 조항으로 의회 승인 없이 동원 가능한 긴급 수단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10% 글로벌 관세를 선언한 뒤, 하루 만에 관세율을 15%로 상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는 오는 24일부터 발효돼 최장 150일까지 유지될 수 있으며, 이후 연장에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법 301조(불공정무역 제재)와 관세법 338조, 안보를 이유로 특정 품목에 고율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무역확장법 232조 등을 활용해 ‘더 강한 무역 규제’를 검토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관세 시대, ‘종료’ 아닌 정책 ‘변경’
시장에선 이번 판결을 ‘관세 시대의 종료’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이번 판결은 어디까지나 IEEPA를 근거로 한 상호관세에 대한 위헌 판단일 뿐 다른 법에 근거한 관세에는 직접적인 제약을 주지 않는다. 미국은 무역법 201조(세이프가드), 301조(불공정무역 보복), 232조(안보 관세)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관세를 우회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여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강대승 SK증권 연구원은 “이번 판결은 관세 정책의 종식을 의미한다기보다 관세 구조의 ‘세대교체’ 출발점에 가깝다”며 “무역법 122조를 활용한 15% 글로벌 관세는 실질적으로 관세 부과 시점을 150일 뒤로 미룬 것과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무역법 122조가 150일 한시 조치인 만큼 향후 201조·301조 확대 적용과 232조에 따른 품목별 관세 강화 등 다른 형태의 관세 카드가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치적 또는 물가적 요인을 고려하면 트럼프 정부가 곧바로 극단적인 관세 정책으로 회귀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관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될 경우, 이미 높은 물가와 휘발유 가격에 민감한 유권자 부담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권희진 KB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이란 등 지정학 리스크로 국제유가가 오르고 미국 내 휘발유 가격도 다시 오르는 상황에서 중간선거 전까지는 물가를 자극하는 새로운 관세 카드를 서두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국내 증시 영향은 ‘중립’…관세보다 실적·업황
국내 증시에 미치는 영향은 ‘중립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IEEPA 상호관세가 무효화되면서 미국이 부과 가능한 기본 관세율에 15% 상한이 생긴 점은 한국 입장에선 부담을 키우지 않는 방향이다. 지난 7월 한·미 관세 협상 과정에서 약 15% 수준의 관세가 일정 부분 시장 가격에 반영돼 있는 만큼, 이번 조치로 한국이 마주하는 실질 관세율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 산업통상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은 이날 시장 상황 점검 회의를 열고 “대법원 판결 이후 미국의 통상 변수 변동성이 커졌지만, 국내 금융·외환시장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한국의 수출 구조를 보면 반도체와 자동차가 미국향 수출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최근 1~2년간 높은 관세 환경 속에서도 수출은 비교적 견조한 흐름을 이어왔다.
증시 전문가들은 따라서 최근 국내 증시 강세가 특정 정책 이벤트보다 업황 회복 기대와 수급 변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통상 정책의 큰 방향이 일정 부분 정리되면서, 투자자 관심은 관세 이슈보다 기업 실적과 산업 사이클로 다시 이동하는 국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다.
관세보다 ‘수익성’…ROE–COE 높은 업종 주목
투자 전략 측면에서 전문가들은 ‘수익성’을 핵심 키워드로 꼽는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관세 무효에 따른 비용 절감과 환급 기대가 커지면서 수출주가 지수 상승을 이끌 여지는 충분하다”면서도 “상호관세가 다른 형태의 관세로 대체되더라도 반도체·자동차 등에 대한 품목 관세는 여전히 남아 있는 만큼 미국의 추가 대응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관세 부담을 넘어서 실제로 이익을 내는 기업에 주목해야 한다”며 “시장금리가 오르고 금융환경이 타이트해지는 국면에서는 수익성 확보가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연구원은 특히 “자기자본이익률(ROE)과 자기자본비용(COE)의 격차가 큰 기업일수록 관세 변동이나 금리 상승에도 버틸 체력이 있다는 의미”라며 “기존 주도주인 반도체를 비롯해 조선·음식료·증권 등은 ROE–COE 스프레드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업종”이라고 설명했다.
ROE–COE 스프레드는 쉽게 말해, 자본이 요구하는 ‘이자(자본비용)’보다 얼마나 더 많은 수익을 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스프레드가 클수록 이익 여유분이 크고, 관세나 금리 상승 같은 외부 충격에도 배당과 투자 여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김준영 iM증권 연구원은 “한국은 당장 관세율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유동성이 풍부한 시장 환경을 고려하면 한국시장에서는 미국향 수출 비중이 높은 섹터로의 쏠림이 나타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관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해진 소비 관련 업종 가운데 화장품, 음식료, 가전, 의류 OEM 등이 수혜 기대감으로 주목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