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산 반도체 공급망을 차단하는 정책과 고성능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출 통제를 동시에 강화하면서, 한국 메모리 기업들이 위험과 기회 사이 복잡한 셈법을 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중국산 범용(레거시) 메모리 퇴출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수요 확대라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지만, AI 반도체와 함께 쓰이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출 규제가 중국뿐 아니라 제재 국가와 일부 신흥 시장까지 확대될 경우 핵심 성장 시장이 제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9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미국 연방조달규정(FAR) 위원회는 지난달 17일(현지시간) 중국 주요 반도체 기업이 생산한 칩이 포함된 반제품과 완제품을 연방 정부가 구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칙 초안을 공개했다. 2027년 12월부터 적용되는 이 규제 대상에는 중국의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SMIC와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CXMT), 양쯔메모리(YMTC)가 포함됐다.
서버·PC·스마트폰 같은 상용 완제품에 들어간 칩까지 포함하는 만큼, 연간 약 8500억달러(한화 약 1200조원) 규모에 이르는 미국 연방조달 시장에서 중국 반도체가 사실상 배제되는 셈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의 공급망 전략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정부 조달 시장에서 중국산 반도체 사용이 제한되면 기업들이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일반 상업용 제품에서도 중국 공급망을 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생산하는 D램과 낸드플래시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미국 공공기관과 대형 IT·클라우드 기업들이 중국산을 대체할 안정적인 공급처를 찾는 과정에서 한국 메모리 업체의 비중이 높아질 수 있어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안보 명분으로 중국 반도체 공급망을 제한하면서 결과적으로 한국 메모리 기업에 시간을 벌어주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며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가 약해지면 D램과 낸드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지배력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AI 반도체와 HBM 시장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2024년 말 규정을 개편하면서 HBM과 관련 장비를 별도의 수출 통제 품목으로 묶었다. 이 조치는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와 이란 등 제재 대상 국가와, 이들 국가에 본사를 둔 기업이 운영하는 해외 법인까지 포괄하도록 설계됐다.
HBM은 AI 데이터센터 서버에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함께 사용되는 초고속 메모리다. 대규모 AI 연산에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부품으로, 현재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미국 마이크론이 글로벌 시장을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문제는 규제 범위가 확대될 경우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빠르게 늘고 있는 신흥 시장에서 수요가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HBM은 현재 메모리 산업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이자 핵심 수익원”이라며 “수출 규제가 넓어지면 일부 시장 접근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규제의 강도에 비해 허점도 존재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AI 전문 싱크탱크 AI 프론티어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HBM 자체는 통제 대상이지만 이미 패키징된 칩 형태나 제3국을 통한 간접 수출은 상대적으로 관리가 느슨하다”고 분석했다. 일부 해외 분석에서는 대만 업체가 일반 프로세서에 한국산 HBM을 붙여 수출한 뒤 중국에서 메모리만 분리해 사용하는 방식의 우회 사례도 거론된다.
이 경우 한국 기업은 수출 규제로 판로가 줄어드는 반면, 중국의 기술 확보 속도는 예상보다 크게 늦춰지지 않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정책 방향 역시 일관되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은 한때 중국 메모리 업체 CXMT를 추가 제재 목록에 올리는 방안을 검토했다가 보류했고, 최근에는 엔비디아의 일부 AI 가속기 대중 판매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등 산업계 부담을 고려한 완화 기류도 보인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상황이 한국 메모리 기업에 복합적인 전략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중국산 범용 메모리 규제는 단기적으로 수혜가 될 수 있지만, AI 반도체 수출 통제가 강화될 경우 고부가 메모리 시장 확대에는 제약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엇박자 규제’ 환경에 맞춰 기업과 정부의 입체적인 대응이 필수라는 분석이다. 범용 메모리 분야의 단기적 수혜에 안주하지 말고, 생산 거점을 전략적으로 재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업계 전문가는 “중국 공장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 범용 메모리 생산을 동남아나 미국으로 점진적으로 분산하고, HBM 등 차세대 첨단 메모리는 한국과 미국 등 동맹국 내 라인을 중심으로 증설하는 투트랙 전략이 불가피하다”며 “동시에 중국향 AI 메모리 사업은 규제 안에서 최소화하고, 미국·유럽·중동 빅테크와의 장기 공급 계약으로 성장성을 방어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