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값 많이 쓰는데 신약 접근성 최하위”…건보재정 담보 ‘약가정책 로드맵’ 필요

“약값 많이 쓰는데 신약 접근성 최하위”…건보재정 담보 ‘약가정책 로드맵’ 필요

약제비 비중 20%…OECD 평균 최대 2배
성분명 처방·참조가격제·경쟁입찰 대안
효과 불분명한 약 유지…“약품 재평가 이뤄져야”
정부 “약가 개편 추진하되 산업 생태계·리스크 함께 고려”

기사승인 2026-03-11 12:51:58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국민 의료비에서 차지하는 약제비 비중은 20%에 달하는데, 정작 환자가 필요로 하는 혁신 신약 접근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이다. 고령화로 약품 처방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보건의료체계와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약가 정책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석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정책국장은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된 ‘건강보험 중심 약가제도 개편을 통한 재정 지속가능성 확보 토론회’에서 “약가제도의 근본적인 변화와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약가 결정 과정의 핵심 거버넌스를 정상화해야 한다”며 약가제도 개편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토론회는 남인순·이수진·서영석·김윤·장종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동 주최하고, 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건보노조)이 주관했다.

인구 고령화에 따라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에 경고등이 켜졌다. 건보노조에 따르면 지난 2024년 국민 의료비에서 약제비 비중은 20.5%(27조원)를 차지했다. OECD 평균(14.4%)은 물론 영국(11.8%), 덴마크(6.2%), 프랑스(13.1%) 등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약 1.5~2배에 달하는 규모다. 행위별 수가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16.3%)과 독일(14.3%), 프랑스(13.1%), 영국(11.8%) 등과도 비교했을 때 의료비에서 약제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약제비 급증의 원인으로는 급속한 고령화와 함께 제네릭(복제약) 난립이 꼽힌다. 제네릭은 국내 급여의약품의 약 90%를 차지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지난 6월 발표한 ‘2024 급여의약품 청구 현황’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급여의약품 등재 품목은 2만1962개로 이 가운데 단독 성분으로 등재된 오리지널 의약품은 2474개(11.3%)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부분은 동일 성분의 제네릭이 함께 등재된 구조다.

외국의 경우 약가 정책은 총재정 내에서 통제되는 추세다. 고가 신약이나 무차별적으로 제네릭 등재가 허용되는 경우는 없으며, 처방과 조제에 대한 재정 통제 기전이 작동한다. 반면 한국은 약제비 지출은 많지만, 재정 대부분이 고가의 제네릭에 쓰이고 있어 혁신 신약 접근성은 OECD 최하위 수준이다.

제네릭 처방액은 전체 약품비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공개한 ‘제네릭 의약품 약가제도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2022년 전체 약품비 25조9000억원 중 제네릭 처방액은 53%인 13조6000억원으로 집계됐다. 특허 만료된 240개 성분 중 제네릭이 오리지널보다 저렴한 성분은 단 13개(5.4%)에 불과하다. 나머지 227개 성분에서 제네릭은 오리지널과 비슷하거나 더 비싸다. 특허가 만료되면 제네릭 진입으로 약가가 하락해야 정상이지만, 특허 만료 후에도 시장이 오히려 확장되는 역설적 구조가 고착화 된 것이다.

그동안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되면 최초 등재되는 제네릭의 가격을 오리지널 대비 53.55%로 산정하는 공식을 장기간 유지해 왔다. 미국, 영국 등의 경우 제네릭 진입 초기에는 오리지널 대비 50~60% 수준에서 가격이 형성되더라도 다수의 경쟁자가 진입함에 따라 6개월~1년 이내에 10~20% 수준으로 가격이 급락하는 시장 기전이 작동한다.

한국의 제네릭 효율비는 1.2:1(사용량 49%/지출 41.7%)로 제네릭을 써도 비용이 줄지 않는 구조다. 이에 반해 미국은 4.5:1(사용량 90%/지출 20%)로 제네릭이 재정 절감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평균 효율비는 3.7:1(사용량 70%/지출 19%)이며 가격 경쟁이 작동하고 있다.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건강보험 중심 약가제도 개편을 통한 재정 지속가능성 확보 토론회’가 개최됐다. 신대현 기자

나영균 배재대 보건의료복지학과 교수는 “지금 당장 약제비 구조를 개혁하지 않으면 건강보험이 국민연금보다 더 심각한 재정 문제를 겪을 수 있다”며 개혁 방안으로 △성분명 처방 의무화 △참조가격제 도입 △경쟁 입찰 도입 등을 제시했다.

나 교수는 “성분명 처방을 의무화해 대체조제를 활성화하면 연간 약 7~9조원의 재정 절감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또 참조가격제를 통해 제네릭 가격 경쟁을 유도해 가격을 약 40% 수준으로 낮출 경우 추가로 약 2조원의 재정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보험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경쟁 입찰 방식으로 동일 효능 약품 중 가격이 낮은 일부 제품만 보험 적용 대상으로 선정하면 약가를 약 20% 수준까지 낮출 수 있고, 추가 절감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면서 “이 세 가지 방안을 단계적으로 시행하면 현재 약 27조원 수준인 약품비를 절반 수준인 약 13조원 정도까지 줄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정형준 원진녹색병원 대표원장(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환자들을 진료할 때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약이 너무 많다는 점”이라며 “같은 성분의 약이 지나치게 많다”고 비판했다. 정 원장은 “A병원에서 B병원으로 환자가 오면 기본적인 만성질환 치료제조차 병원마다 처방되는 약이 다르다. 결국 하나하나 다 찾아봐야 하는데, 의료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정확한 성분과 효과에 대한 학습이나 임상 경험이 공유되기보다 상품명에 익숙해지는 문제가 생긴다”며 “심지어 성분명을 이야기하면 무슨 약인지 모르는 상황까지 벌어지는데, 이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환자들도 본인이 어떤 약을 먹는지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정 원장은 “외국에서 제네릭은 대부분 성분명으로 판매된다. 예를 들어 ‘암로디핀’ 성분이라면 ‘C사 암로디핀’ 이런 식”이라며 “한국의 제네릭 구조는 후진적이다. 오리지널도 아닌 제네릭을 상품명으로 대량 보유하고 처방하는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효과가 불분명한 약이 계속 유지되는 문제도 짚으며 약품 재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실제 사례로 천연물 의약품 위염 치료제 ‘스티렌정’과 뇌기능 개선제 ‘콜린알포세레이트’ 문제를 언급했다. 정 원장은 “콜린알포세레이트는 2020년 임상 재평가 대상이 됐지만, 행정소송 등으로 계속 끌어오고 있다. 이 약 하나만으로도 건강보험 재정이 수천억원 규모로 지출된다”며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허가를 담당하고, 건강보험 등재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하고, 약가 협상은 건보공단이 한다. 책임이 분산돼 있어 제대로 된 재평가가 어렵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애매하게 등재된 약은 5년 안에 재평가하고, 제약회사 자료가 아니라 별도의 평가 트랙을 만들어 퇴출할 수 있어야 한다”며 “약가 결정권을 건보공단 중심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이외에도 정 원장은 △처방전에 의약품 브랜드명이 아닌 국제일반명(INN)을 기재하도록 하는 성분명 처방 시범사업 도입 △건보공단 산하 제약회사(공공제약사) 설립 등을 제시했다.

정부도 건강보험의 연간 흑자 규모가 감소 추세라며 재정 지속가능성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고 전했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총수입 증가율은 2022년 10.3%에서 2023년 6.9%, 2024년 4.4%, 2025년 3.8%로 매년 감소 추세다.

김한숙 복지부 보험정책과장은 “현재 재정 측면에선 수입을 늘리는 방안과 함께 지출의 효율성을 높이고, 불합리한 부분을 먼저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결국 건전한 산업 생태계와 제도가 함께 작동해야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지속 가능한 의약품 정책을 운영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약가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정부는 올해 하반기부터 신약의 53.55%인 제네릭 약가를 40%로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한 약가제도 개편안을 발표했다.

김 과장은 “약가 문제는 단순히 가격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약 산업과 의약품 개발·생산·유통 등 전체 생태계와도 연결된 사안”이라며 “약가 제도 개편이 실제 시행될 경우 현장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부도 일정 부분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계속해서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제도가 시행되더라도 모니터링을 강화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 다시 개선하는 선순환 체계로 정책을 운영해 나갈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