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2월, 단 사흘 만에 5000억원의 자금을 쓸어 담으며 한국 자본시장의 판도를 바꾼 전설이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선보인 국내 1호 뮤추얼 펀드 ‘박현주 1호’다. IMF 외환위기라는 폐허 속에서 ‘공모 펀드’라는 새로운 문법으로 개인 투자자들에게 자본 성장의 과실을 안겨줬던 그 사건은 한국 자본시장의 빅뱅으로 평가된다. 당시 개인들은 간접투자라는 개념조차 생소했지만 자본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믿고 돈을 맡겼다.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17일, 한국형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BDC) 제도가 시행되면서 금융투자업계는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맞이할 전망이다. 개인도 소액으로 비상장 벤처·혁신기업과 코넥스·코스닥 중소형주 등 비상장·프라이빗 성격 자산에 간접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1990년대 뮤추얼 펀드가 상장 주식 투자의 대중화를 이끌었다면 BDC는 그 영토를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됐던 ‘프라이빗 마켓(비상장)’으로 확장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는 평이다. 이는 상장 시장 중심으로 성장해 온 한국 자본시장이 이제 비상장 성장기업까지 자본 공급 범위를 넓히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로도 해석된다.
BDC로 자본시장 중심의 모험자본 공급망 재편
이번 BDC 제도는 ‘모험자본 공급 다변화’라는 국가적 정책 과제를 핵심 배경으로 한다. 그동안 국내 중소·벤처기업의 성장자금 공급은 은행 대출이나 정부 정책금융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 이를 자본시장 중심으로 옮겨 기업의 성장 단계별로 적절한 자기자본을 공급하자는 취지다. 특히 상장 공모펀드 형식을 빌려와 개인 투자자들도 비상장·프라이빗 자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클 것이라는 평가다.
이 같은 정책 시도는 최근 몇 년간 국내 벤처투자 시장에서 나타난 회수시장 경색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기업공개(IPO) 시장 둔화와 밸류에이션 조정으로 벤처캐피털의 투자 회수 통로가 좁아지면서 성장 기업에 대한 후속 투자와 자금 순환 구조가 약화됐기 때문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BDC 도입이 단순히 벤처 투자 확대를 넘어 막혀 있는 벤처 생태계의 엑시트(자금 회수) 경로를 자본시장으로 확장하려는 정책적 시도로도 읽힌다.
정부가 벤치마크한 미국의 경우, 상장 BDC가 중견기업 직접대출과 메자닌(Mezzanine) 투자의 핵심 채널로 자리 잡으면서 중소·중견기업 금융에서 비은행권의 역할을 키워왔다. 대표적인 미국 BDC인 아레스 캐피털(ARCC)은 포트폴리오 대부분을 1·2순위 담보대출 등 채권성 자산에 투자하고, 여기서 나오는 이자를 기반으로 고배당을 지급하는 인컴 중심 BDC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상장 BDC들은 세제상 규제투자회사(RIC) 지위를 통해 법인세 부담을 크게 줄이는 대신 매년 발생한 과세소득의 90% 이상을 배당으로 분배해야 한다. 이 RIC 분배 규정 덕분에 구조적으로 고배당 정책을 유지해 왔고, 실제로 상장 BDC의 평균 배당수익률은 대체로 연 8~11% 수준으로 전통적인 리츠(REITs)나 하이일드 채권보다 높은 편이다.
반면 한국형 BDC는 비상장 벤처·혁신기업, 코넥스·코스닥 중소·창업기업, 벤처조합 구주 등에 자산총액의 60% 이상을 투자하도록 설계됐으며 금전대여는 주투자대상기업 투자금액의 40% 이내로 제한하는 등 미국형처럼 대출 중심 구조라기보다는 비상장 지분·성장주 투자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구조다. 때문에 성공적인 기업공개(IPO)·엑시트에 따른 자본차익을 겨냥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메자닌 투자는 채권의 안정성과 주식의 성장 가능성 사이의 중간 성격을 가진 투자로,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교환사채(EB) 등이 대표적이다.
‘1호’ 타이틀 신중 기하는 운용사
정부의 기대와 달리 국내 자산운용업계 분위기는 기대감보다는 ‘서둘러 첫 상품을 내놓는 건 부담스럽다’는 신중론이 우세하다. 지난해 증권사들이 종합금융투자사업자계좌(IMA) 1호 타이틀을 따기 위해 치열한 속도전을 벌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형 운용사를 중심으로 “상품 출시를 검토 중”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내놓고 있다. 업계 내부적으로는 1호 타이틀을 두고 속도전보다는 서로 눈치를 보는 관망 기조가 뚜렷하다. 새로운 먹거리인 만큼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첫 상품 출시에 대한 부담은 상당하다는 게 공통된 분위기다.
가장 큰 이유는 비상장 자산에 집중 투자하는 BDC 구조상 극단적인 불확실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대형 운용사 관계자는 “비상장 투자는 소위 대박이 아니면 쪽박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며 “국가 정책에 호응해 상품을 내놨다가 만약 원금을 크게 손실 보는 사태가 발생하면 그 모든 민원과 법적 책임은 고스란히 판매처이자 운용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토로했다. 단순히 상품 하나가 실패하는 문제를 넘어 오랜 시간 쌓아온 운용사 전체의 브랜드 신뢰도가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들을 주저하게 만드는 셈이다.
‘가치평가 불확실성+구주 설거지’ 리스크 우려
비상장 자산 특유의 가치평가 불확실성은 제도 안착을 가로막는 최대 암초로 꼽힌다. 초 단위로 시세가 형성되는 상장 주식과 달리, 비상장 주식은 정보의 비대칭성이 심해 사실상 ‘부르는 게 값’이 되는 경우도 많다. 최근 정부의 생산적 금융 전환 기조 아래 부동산이나 은행 예금에 묶여 있던 유동성이 증권가로 유입되면서 비상장 기업이나 메자닌 자산에는 상장 주식 못지않거나 더 높은 밸류에이션이 붙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검토했던 A라는 업체의 경우, 짧은 실사 기간에도 기업 가치가 수 배로 뛰는 바람에 결국 투자를 접었다”며 “시중 유동성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밸류에이션이 과열된 사례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고변동성 환경 속에서 안전자산에서 빠져나온 자금이 비상장·메자닌으로 몰리면서, 밸류에이션 버블이 BDC 도입 이후 공모시장까지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업계 일각에서는 ‘구주 설거지’에 대한 날 선 우려도 제기된다. BDC가 기존에 운용사들이 운용하던 사모펀드나 계열사가 보유해 온 비상장·구주 물량의 엑시트 창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자산 떠넘기기’를 통해 과거에 담아둔 비상장 자산을 공모 구조를 통해 불특정 다수 개인 투자자가 떠안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다.
또 다른 구조적 위험으로는 상장 공모 상품 구조와 장기 비상장 자산 사이의 ‘유동성 미스매치’가 거론된다. 공모 상품은 시장에서 매일 가격이 형성되지만, 비상장 자산은 실시간 시장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자산 가치 평가와 실제 시장 거래 가격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거나 시장 상황에 따라 BDC 주가가 자산 가치 대비 큰 할인 또는 프리미엄 상태로 거래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현재 국내 벤처 생태계에서 탄탄한 실적을 내는 허리급 혁신 기업이 실종된 상태라는 점도 부담 요인이다. 제도적으로 BDC는 자산총액의 60% 이상을 비상장 벤처·혁신기업, 코넥스·코스닥 중소·창업기업, 벤처조합 구주 등 주투자대상기업에 투자해야 하고, 안전자산인 국공채·현금·예·적금 등에 최소 10%를 배분해야 한다. 나머지 최대 30% 범위에서만 비교적 재량 있는 운용이 가능하다.
문제는 양질의 대상이 부족할 경우, 운용사가 실적이 검증되지 않은 기업을 높은 밸류에이션에 매입하는 ‘버블 형성’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조적으로 주식 비중이 높은 공모 구조인 만큼 담을 만한 우량 성장주가 씨가 마른 상황에서는 자칫 개인들에게 리스크만 전가하는 고위험 창구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제도 성공, 보수적 설계·운용 역량·세제혜택
전문가들은 한국형 BDC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보수적인 제도 설계와 엄격한 운용 역량이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BDC 운용사는 최소 모집가액 300억원을 채워야 하고, 600억원 이하분에는 5%, 초과분에는 1%를 자기자본으로 출자해 일정 기간(5년과 만기 절반 중 더 긴 기간, 최장 10년) 보유해야 한다. 책임 운용을 위한 시딩(Seed Money) 의무가 이미 제도에 반영된 셈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제도 안착 초기만큼은 시딩 의무 비율을 한층 더 높이는 방안 등 운용사와 투자자가 동일선상에 서 있다는 신호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비상장 자산 특유의 불투명성을 감안해 BDC에는 분기별 공정가치 평가와 반기별 외부평가, 자산총액의 5%를 넘는 자산(금전대여 포함)의 취득·처분·변동, 주투자대상기업의 주요 경영사항 발생 등에 대한 수시 공시 의무도 부과된다. 일반 공모펀드보다 평가·공시 강도가 높은 대신, 투자자 보호 장치를 촘촘히 설계했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제도 초기에 한해서만큼은 평가·공시 주기와 내용을 한층 보수적으로 운용해 가치평가 논란과 분쟁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반 개인에게 처음 개방되는 비상장·프라이빗 자산이라는 점에서 금융당국의 투자자 교육과 위험 고지 강화도 필수 과제로 꼽힌다. 고위험·장기투자라는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고수익 기대만으로 자금이 쏠릴 경우, 과거 사모펀드 사태와 유사한 대규모 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개인투자자 유입을 뒷받침할 유인 체계 측면에서는 필요할 경우 세제 인센티브 등도 병행해 높은 위험을 감수하고 장기 자본을 공급할 준비가 된 투자자가 유입되도록 설계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한아름 한국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BDC 사례를 보면 제도 도입 자체보다 △투자대상 규율 △레버리지 한도 △세제·배당 △보수체계와 공시 등 세부 설계를 얼마나 정교하게 맞추느냐가 성패를 갈랐다”며 “한국형 BDC도 투자자 보호장치와 운용사 인센티브를 함께 고려한 규율체계와 운영기준을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형 BDC가 코스닥과 벤처 생태계의 새로운 자금 파이프라인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여전하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BDC가 비상장 벤처·혁신기업에 투자하는 만큼 정책적으로는 세제 혜택을 통해 개인 자금을 유치하는 한편, 투자자들도 일부 투자에서 손실이 발생하거나 수익률이 낮아질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운용사는 이런 위험을 사전에 충분히 고지해 민원 혹은 소송 리스크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한국형 BDC의 성패는 제도 도입 자체보다 실제로 어떤 기업에 자본이 공급되고, 그 투자 성과가 시장에서 어떻게 검증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가와 시장, 투자자가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기관과 개인의 모험자본 참여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확대되고 중소·혁신기업의 성장 사다리가 한층 촘촘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