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김단비 기자] 김○○, 박△△, 홍□□…. 총 일흔한 명의 이름이 호명됐다. 한 사람씩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강당을 가득 메운 객석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명된 일흔한 명은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육체를 의학연구용으로 의과대학에 기증한 분들이다. 죽음을 맞이한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들 자신의 몸이 의과대학 학생들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 소중히 사용되길 바라며 시신 기증을 결정했다. 지난달 16일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시신 기증자를 추모하는 감은제가 열렸다. 고대의대는 매년 4월 셋째 주 목요일에 시신 기증자를 기리는 합동추모제, '감은제(感恩祭)'를 진행한다.
대학교수로 재직해온 고(故) 윤창주씨의 시신이 지난해 9월 고대의대에 기증됐다. 시신 기증자를 기리는 감은탑에 그의 이름 석 자가 새겨졌다. 윤씨는 가족들에게 일평생 소아마비로 살아온 자신의 몸이 의학발전을 위한 좋은 연구대상이 될 것이란 말을 자주 전해왔다고 한다. 시신 기증자의 합동추모제, 감은제가 열린 지난달 16일 고대의대에서 고 윤창주씨의 아들 윤희선씨를 만났다. 아들 윤씨는 탑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을 보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으시고 평생을 장애인으로 사셨습니다. 당시에는 의학 기술이 부족해 제대로 된 약이나 치료를 받지 못하셨고, 이에 따른 아쉬움이 크셨습니다. 그 뒤로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께서는 줄곧 우리나라의 의학이 발전하는 데 자신의 몸이 좋은 연구대상이 될 것이라며, 평생 시신 기증의 꿈을 갖고 계셨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아버지의 시신을 고려대학교에 모실 때에도 부슬비가 내렸는데, 7개월 만에 아버지를 뵈러 가는 감은제 날에도 부슬비가 내렸습니다. 부슬비를 맞으며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감은탑 앞에 다시 서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습니다.”
고 윤창주씨는 죽음 직전, 폐에서 전이된 다발성 뇌종양으로 신체기능과 인지능력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시신기증 신청서를 직접 작성했다. 그가 작성한 시신기증 신청서에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힘겹게 써내려간 “잘 부탁한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한 구의 시신이 된 자신을 마주할 의대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의학 발전을 위해 부디 잘 사용해주길 바라는 그의 진심이 묻어난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시신기증 의사를 밝혀 오셨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혹시나 마음이 변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이 직접 시신기증 신청서를 드리면 혹시라도 상처를 받으실까 염려돼 당시 간병인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간병인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문자에는 환하게 웃으시며 신청서를 들고 계신 아버지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기증서에 의대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는 부분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흔들리는 글씨로 간단하게 ‘잘 부탁한다’라고 적으셨습니다. 환한 미소와 그 문구가 아직도 잊혀지질 않습니다.”
시신 기증자를 추모하는 감은제는 기증자의 가족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 이날 고대의대생들은 기증자의 가족들을 감은탑까지 안내하며 함께 추모탑 앞에서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의 뜻이 잘 전달돼 아버지를 뵙게 되는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아버지의 장례미사 중 신부님께서 ‘윤창주 교수님께서는 이제 시신기증이라는 방법으로 마지막 강의를 하러 떠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강의에 참석하신 모든 학생들에게 좋은 교수님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추모제가 끝나고 고대의대 해부학교실의 엄창섭 교수를 만났다. 엄 교수는 학생들에게 해부학실습이 진행되는 한 학기 동안 자신의 감정을 글로 적어 레포트로 제출하도록 한다. 해부학실습이 단순히 몸을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엄 교수는 “학생들은 해부학실습을 통해 처음 죽음을 접한다. 의대생에게 이 과정은 가장 힘겨운 과정이면서 나중에 진료에 임하게 될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미친다. 해부학교실 교수들은 기증된 한 구의 시체를 보며 그들의 숭고한 결정이 헛되지 않도록 실력 있고 진정성을 갖춘 의사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업한다”고 말했다.
16일 오후 열린 감은제는 오전 내 내렸던 비가 필연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진행됐다. 엄 교수는 “감은탑 주변으로 의대생과 기증자의 가족이 한데 모였다. 하늘에서는 기증자가 자신의 가족들과 의대생들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엄 교수는 시신 기증에 대해 “시신 기증은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분들만 하는 게 아니다. 우리네 이웃들이 한다. 그들이 의대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보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천 번의 고민 끝에 결정했다는 분도 있고, 자신의 몸을 잘 다뤄주길 바라는 당부의 글도 있다. 학생들은 시신 기증자 분들이 마지막으로 적고 간 메시지를 보며 낯선 주검과 교감을 하며 참된 의사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고 전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kuk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