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보관시설 부재로 물류‧유통 업체에 위탁, 수수료 발생
[쿠키뉴스] 유수인 기자 = 국내에서 제조·수입되지 않는 의료기기를 정부가 직접 수입하는 ‘희소‧긴급도입 필요 의료기기 국가 공급 사업’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예산 및 인력‧시설 등의 인프라 지원이 부족해 ‘제2의 고어사(社) 사태’ 발생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턱없이 적은 예산으로 제품을 선구매하고 환자에게 받은 대금으로 재구매하는 식이다보니 의료기기가 공급되기까지 수개월의 대기시간이 발생하고 있고, 제품 보관시설 부재로 물류‧유통 업체에 위탁하면서 발생한 수수료 때문에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급 중단이 우려되는 의료기기를 모니터링하는 전문 인력이 없어 최소 수량을 미리 확보하는 등의 선제적 대응 조치가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 소아심장 인공혈관 공급 차질로 사업 촉발
‘희소‧긴급도입 필요 의료기기 공급 사업’은 미국 고어(GORE)사의 한국시장 철수로 발생했던 소아심장 인공혈관 공급 차질 문제로 촉발됐다.
고어사는 시장성 부족 등을 이유로 지난 2017년 10월 한국시장에서 철수한 바 있다. 고어사가 제공하는 인공혈관 등의 제품은 선천성 심장기형 환아들의 수술(폰탄수술)에 꼭 필요한 제품인데다가 대체품이 없어 수술이 무기한 연기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에 보건복지부·식품의약품안전처 등 정부부처와 환우회 및 학회가 나서 공급 재개를 촉구해 공급이 재개됐다.
당시 인공혈관 부족 사태를 겪었던 박천수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소아심장외과) 교수는 “고어사 제품은 소아심장 관련 몇 개의 질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제품이었다. 공급 중단 몇 달 전부터 수입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설마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생기겠느냐고 생각했다”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입이 가능한 시점까지 최대한 많은 물량을 사 재고를 쌓는 일이었다. 병원끼리 도우면서 버텨봤지만 금세 동이 나 환우회가 나섰다”고 회상했다.
최재영 세브란스병원 소아심장과 교수는 “거의 준응급상황이었다. 폰탄수술은 3단계로 나뉘는데 3번째 수술을 못하게 됐기 때문”이라면서 “다행히 우리 병원에서 치료를 못해 잘못된 사례는 없었지만 전국적으로는 있었다고 본다. 그러다보니 환자, 보호자가 나서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식약처는 인공혈관 부족 문제를 겪은 이후 희소‧긴급도입 필요 의료기기 공급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관련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어 2019년 6월 의료기기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희귀·난치질환자 등 치료에 필요한 희소·긴급도입 필요 의료기기가 시장성 부족 등을 이유로 국내에 제조·수입되지 않는 경우 식약처가 직접 수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업무는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정보원)에 위탁했다. 병원(환자)이 정보원에 의료기기 공급 신청을 하면 필요성이 인정되는 제품에 한해 해외 제조‧유통사에 구매를 요청하고, 받은 제품을 다시 병원(환자)에 공급하는 식이다.
◇예산 1.5억원으로 선구매 후 결제대금 통해 재구매
정보원은 지난해부터 총 5회에 걸쳐 15개 공급대상 의료기기를 선정하고 올해까지 총 1452개(9개 제품) 의료기기를 수입해 의료기관 등에 공급하고 있다. 참고로 고어사의 인공혈관은 급여기준이 신설됨에 따라 비교적 공급이 원활해졌다.
그러나 수요 대비 예산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지난해 희소·긴급도입 필요 의료기기 예산은 1억5000만원, 사업 관리운영비까지 포함하면 2억원 정도였으며, 실제 구매 금액은 4억3591만원이었다. 예산이 적다보니 제품 구매 후 환자들에게서 받은 대금으로 재구매를 하며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정보원 관계자는 “일반 예산은 한도 내에서 구매해 소진하면 되지만 우리는 (그 예산으로는) 커버가 어렵기 때문에 재투자 개념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보원이 먼저 사고 환자 돈으로 재구매를 하며 최대한 많은 물량을 확보하려고 한다”면서 “최종으로 회수한 비용은 국고로 환수한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신청한 의료기기가 병원에 도달하기까지 수개월의 대기시간이 발생하고 있다.
최재영 교수는 “사업 시행 이후 상황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신청하면 몇 달 후에나 돼야 받을 수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면서 “정보원이 여분의 제품을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 바로 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기는 사이즈별로 치면 100종이 넘는데 작년 예산은 1억5000만원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박천수 교수는 “응급상황에서 써야 하는 물품들도 있는데, 정보원에 재고가 없으면 그 환자는 위험해진다. 신청하고 일주일 기다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면서 “지금은 카드깡을 하듯 돌려막고 있는 식인데 병원이 요구했을 때 실시간으로 지급될 수 있도록 미리 물량을 확보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올해 사업 총 예산은 7억원으로 증액됐지만 이마저도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이 의료계는 보고 있다.
◇ 보관시설, 인력 등 인프라 부재로 환자 부담 증가
의료기기 자체 보관 및 유통을 위한 보관시설도 없기 때문에 물류‧유통 전문 업체에 위탁해야만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수수료 때문에 환자들은 원가보다 높은 비용으로 제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다. 최 교수는 “정보원에서 바로 구매해 전달하면 원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금액으로 공급이 될 텐데 중간마진이 발생하면서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의료기기 물류‧유통 등에 필요한 전문 수행 인력도 없다. 이에 희소‧긴급도입 필요 의료기기 공급 전담 운영 부서가 부재하고, 현재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 3명이 해당 사업에 투입돼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정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는 희귀의약품과 국가필수의약품의 국가주도 공급사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4개 본부(기획경영본부, 의약품본부, 개발본부, 수급관리본부), 30명 정원으로 구성‧운영되고 있다.
전문인력 부재는 ‘제2의 고어사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희소‧긴급도입 필요 의료기기 공급 상황 등 관련 정보를 수시로 모니터링하는 인력이 부족할 경우, 공급 중단이 우려되는 제품에 대한 최소 수량 확보 등의 선제적 대응 조치를 취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희귀‧난치질환자에 사용되는 의료기기는 수요가 적기 때문에 제조업체가 매우 적고 대체품이 없는 경우가 많아 공급차질이 발생할 경우 치료 중단 등 심각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공급이 되더라도 기존보다 더 비싼 값으로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고어사의 인공혈관이 단적인 예다. 고어사의 인공혈관가격은 기존 40만원대에서 100만원가량 인상됐다. 치료재료 가격이 삭감되다가 정보원이 공급하게 됐을 때 정상화된 가격으로 공급이 되면서 일부 제품의 가격이 오르게 된 것이다.박 교수는 “인공혈관은 급여가 적용돼 환자 부담이 크게 늘진 않았지만 건강보험 재정으로 지원되다보니 결국 국민 부담으로 이어진다. 느닷없이 (제품 공급이) 끊기는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면서 “이왕이면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도록 재정을 늘려서 인력 등을 충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상황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공급이 안 되고 있는 물품들도 있다. 특히 더 적은 비용과 부담으로 더 좋은 수술 효과를 낼 수 있는 제품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급한 의료기기가 밀려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쓸 수 없는 상황이다”라면서 “심각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환자들의 균등한 치료권 보장을 위해 사업 확대를 위한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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