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OCN ‘경이로운 소문’ 1회에는 주인공 소문(조병규)가 친구들과 웹툰 주인공이 될 히어로 캐릭터를 상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망토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보통의 히어로와는 다르다. 수도를 틀면 녹물이 나오는 반지하 방에 살고 PC방 알바를 하면서 히어로 옷을 대출받아 제작하는 흙수저 히어로다. 성격이 삐딱해 분노 조절이 안 되고 운명의 여인 없이 누군가를 짝사랑 하는 히어로. 한국형 히어로물로 주목 받는 드라마에서 언급된 이 캐릭터는 신선한 설정으로 전형성을 깨는 한국형 히어로의 미래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아직까진 한국을 대표할 만한 히어로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할리우드에선 슈퍼맨부터 아이언맨까지 코믹스에서 탄생한 히어로들이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고 매년 다수의 히어로 무비가 탄생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다. 하지만 넷플릭스를 통해 ‘킹덤’과 ‘스위트홈’이 외국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한국 대중들도 소설이나 웹툰을 기반으로 제작된 웰메이드 히어로물을 소비하는 데 익숙해진 분위기다. 생각해보면 조선시대부터 홍길동, 전우치, 일지매 등 한국 전통의 히어로들은 이미 우리 머릿속에 존재해왔다. 한국형 히어로가 기존 외국 히어로들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를 할리우드 히어로가 한국 작품에 용병으로 출연하는 상황의 가상 대화를 중심으로 정리해봤다.
◇ 금수저 금지
저의 출생 신분과 직업은 무엇이죠. 한국의 왕족이나 제일 잘나가는 부자는 어떨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엔 왕이 없어요. 부자나 권력자도 드물고요. 인기 연예인, 스포츠선수 같은 유명인도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요, 해리포터는 특별한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았고, 배트맨과 아이언맨은 엄청난 부자예요. 슈퍼맨과 토르는 외계인이고, 블랙팬서는 왕족이고요. 제우스의 딸인 원더우먼은 그 자체로 신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태생이 특별한 히어로가 거의 없습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눈에 잘 안 띄는 평범한 인물이거나, 오히려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경우가 많아요. 평범함을 무기로 빌런에게 들키지 않고 숨어서 좋은 일을 하는 편이에요.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정유미)과 ‘스위트홈’의 차현수(송강)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물이고, ‘경이로운 소문’의 소문(조병규)는 어린 시절 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학생입니다. 한국의 전통 히어로 홍길동은 서자라는 출생 신분 때문에 출세가 어렵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인물이었습니다.
◇ 능력 금지
할 수 없군요. 그렇다면 제겐 어떤 능력이 주어지나요. 헐크처럼 힘도 세고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마법도 썼으면 좋겠는데요. 안타깝지만 그것 역시 힘들 것 같아요. 사실 저도 히어로의 뛰어난 신체능력과 마법을 보는 걸 좋아합니다. 특히 도심을 가르며 날아다니는 스파이더맨의 활강 액션과 금속을 조종하는 매그니토의 초능력을 좋아해요. 첨단 기술력을 자랑하는 아이언맨과 앤트맨의 각종 장비를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선 대단한 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거의 없습니다. 작품 안에서 필요한 만큼의 능력이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게 보통이에요.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못하고 눈 깜짝할 새에 악당을 제압하거나 순간이동을 하지도 못하죠. 오히려 주어진 능력을 쓸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요. 안은영이 젤리를 퇴치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있다거나, 소문이 더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 융의 땅을 찾아야 하는 식이죠. 영화 ‘염력’의 석헌(류승룡)은 염력을 사용하기 위해 몸을 비틀고 인상을 쓰는 등 온몸으로 힘을 짜내야 합니다. 전통 히어로인 홍길동이나 전우치처럼 도술을 부려 하늘을 날고 분신술, 변신술을 쓰는 경우가 있으니 조선시대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 조력자 필수
평범하고 능력도 약한 히어로라니…. 그렇다면 홀로 고독하게 활동하는 건 괜찮겠죠. 혼자 움직이는 게 더 편하고 멋있거든요. 자꾸 안 된다고 해서 죄송하지만 그것도 안 됩니다. 생각해보면 할리우드 영화 속 히어로들은 함께 팀을 이루는 것보다 개인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네요. 고독한 히어로의 아이콘인 배트맨도 그렇고 아이언맨도 주변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죠. 울버린이나 토르도 혼자 다니는 편이고요.
하지만 한국 히어로는 혼자 다니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보통 작품 속 주인공보다 더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곤 하죠. ‘염력’이나 홍길동처럼 민중들을 대표하는 히어로가 많습니다. ‘경이로운 소문’과 다음달 공개되는 넷플릭스 ‘승리호’는 누군가의 활약보다 팀플레이를 강조하고요. 단순히 주인공의 숫자가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평범하고 능력도 부족해도 매번 이길 수 있는 한국 히어로의 힘은 개인의 활약보다 많은 대중의 지지에서 나온다는 걸 상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KBS2 ‘동백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나쁜 놈은 백 중 하나 나오는 쭉정이지만, 착한 놈들은 끝없이 백업이 돼”라는 대사를 기억해두면 좋을 거예요.
◇ 무속 신앙 필수
한국 히어로는 확실히 다른 점이 많네요. 그럼 제가 더 알아두거나 공부하면 좋을 내용이 있을까요. 이제야 좋은 질문을 하시네요. 한국에만 있는 세계관을 알아두는 걸 추천해요. 외국엔 그리스 신화와 실제 역사를 제외하면 모티브로 삼을 판타지 세계관이 별로 없죠.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처럼 원작 소설의 세계관을 가져오거나 마블, DC 코믹스처럼 만화책에서 창조한 세계관을 기초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오히려 지구를 벗어난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상하는 것이 미국인들이 공유하는 판타지 세계관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국 히어로는 전통적인 무속 신앙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이로운 소문’엔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융’이란 공간이 등장하고 빌런인 악령들은 이승을 떠나지 못한 원혼이란 설정이죠. 이는 사람이 죽으면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되어 사후세계로 가게 되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설정입니다. 하지만 이생에 한(恨)이 남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렇지 못하고 귀신으로 머물게 되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좋은 곳으로 가게 됩니다. 종교의 영향으로 형성된 이 세계관은 동아시아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영화 ‘신과 함께’나 tvN ‘도깨비’, ‘방법’ 등을 보면 앞으로 어떤 세계관에서 히어로로 활동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bluebell@kukinews.com / 사진=OCN '경이로운 소문'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