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페스’로 통칭되는 RPS는 ‘리얼 퍼슨 슬래쉬’(Real Person Slash)의 줄임말로, 원전을 재해석한 픽션 가운데 실제 인물을 로맨스 관계로 풀어낸 창작물을 일컫는다. 실제 연예인의 유사 결혼 생활을 그린 MBC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 시리즈도 RPS에 속한다. 최근 입길에 오른 RPS는 아이돌 팬덤의 팬픽션 형태를 가리킨다. 이들 중 대다수는 남성 아이돌 그룹 멤버 간 로맨스를 묘사하며, 이 과정에서 성적 표현이 동원되기도 한다. 래퍼 손심바,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등은 이를 근거로 RPS를 “인터넷 성범죄” “성착취물”로 칭하며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팬픽션 속 성적 묘사를 실제 인물에 대한 성범죄로 규정할 수 있을까. 기획사 관계자들은 대부분 고개를 저었다. 팬픽션 등 RPS로 인한 피해가 불분명하고 성희롱이나 명예훼손 등 불법적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RPS가 팬덤 내에서 한정적으로 창작·소비되는 하위문화로 존재해온 만큼, 일단은 팬들의 애정과 선망에 기반한 창작물로 보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가요 기획사 관계자 A씨는 “초상권 침해 등 불법성과 아티스트에게 가해지는 피해가 확실한 딥페이크(인공지능 이미지 합성)와 달리, 팬픽션은 팬들의 놀이문화로 존재해왔다”면서 “수위가 너무 심하거나 불법적인 목적이 있다면 대응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획사 관계자인 B씨 역시 “딥페이크는 돌고 돌아 ‘나’(피해 당사자)에게까지 온다. 반면 RPS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이걸 찾아서 보는 아이돌이 누가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RPS 형태의 팬 픽션은) 팬들이 아이돌 그룹 멤버들 간 관계를 심오하게 생각해서 나타나는 문화”라는 기획사 관계자 C씨의 진단은 특히 흥미롭다. ‘성 착취물’ ‘강간소설’이라는 일각의 주장과 달리, 대다수의 RPS는 팬들이 해석한 아이돌의 캐릭터나 멤버 간 관계성을 창작물에 이식하는 데 집중한다. 이를 성애적 관계로 비틀어 상상하고 서술하는 과정에서 성적 표현이 동원되는 것으로, 생산·소비자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실제 인물을 대상화한 창작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C씨는 “팬들의 애정에서 출발한 문화”라며 “여기에 (아이돌을) 성적으로 희롱하려는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려내는 게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물론 RPS가 팬덤의 하위문화로 지속돼왔다는 사실이 RPS의 무해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가요 기획사 관계자 D씨는 “‘누구와 누가 사귄다’는 수준이 아니라, 비윤리적인 내용의 RPS도 있다고 들었다”며 “신인 아이돌일수록 발언권을 얻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라고 했다. 또한 자극적인 성 묘사는 당사자인 연예인에게 성적 모욕감을 줄 수 있고, 성소수자에 대한 왜곡적 이해로도 이어질 수 있다. 기획사 관계자들이 “아이돌 가수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RPS를 접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한다면 당연히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이은의 변호사는 “RPS는 픽션의 세계다. 법조계에서도 실제 인물을 투영한 창작물에서의 (성적 묘사) 수위가 범죄 행위로 인정될 수 있느냐를 두고 이견이 있다”면서도 “당사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온당하지 않다”고 봤다.
팬덤 내부에서도 미성년 아이돌을 대상으로 성애적인 표현을 쓰거나 비윤리적 설정과 서사를 금지시키려는 등 자정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남명희 작가는 저서 ‘팬픽션의 이해’에서 “팬픽션은 상상이 외부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이를 유출하지 않는 것으로 자정 작용을 한다”며 “팬픽션의 가치는 필력이나 독창성 이전에 원전의 세계를 얼마나 사랑하고 지키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wild37@kukinews.com /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tvN ‘SNL코리아 시즌3’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