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알려진 프랑스어인‘톨레랑스(tolerance)’는 관용을 의미한다.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태도를 말한다. 개인의 이익에 민감한 시대를 살며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의 정당화와 다름에 대한 이분법적 문화와는 확연하게 동떨어진 개념이기에 부끄러워지는 단어이기도 하다.
구교와 신교 사이, 무자비한 살육전으로 대혼란이 빚어졌을 때 등장한‘톨레랑스’는‘나는 무엇을 아는가?’로 상징되는 프랑스 철학의 회의론이 중심에 있다. 나만 옳다는 이기적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된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약자에 대한 관용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시민사회 고도의 공존 기준인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고 시퍼렇게 날이 섰던 대선 이후, 사회통합이 절체절명의 과제로 떠오른 한국 사회에게 던지는 화두가 ‘톨레랑스’인 것이다.
20세기 전까지 서양 문화를 주도한 나라는 단연코 프랑스였다. 유럽의 문화, 예술, 외교 언어는 영어가 아닌 불어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카를 5세 조차도 파리지앵을 동경하며 프랑스 문화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툭하면 유럽의 패권을 놓고 프랑스와 다투던 독일의 전신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왕도 모국어인 독일어 대신 프랑스어를 쓸 정도로 프랑스 문화에 매료되었으며, 러시아 제국 또한 상류층은 프랑스어를 쓰며, 이를 자랑스러워할 정도였다.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의 작품 속에는 등장인물이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실제로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의 러시아 황실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이 정도 되면 이 시기, 프랑스 문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흠모는 절정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긴 지금도‘불란서 영화처럼 이란’문장이 이성 간의 사랑에서 로맨틱한 대사로 차용되니 프랑스 문화에 대한 흠모는 길고도 유구하다.
관용과 자유의 나라, 프랑스는 노벨 문학상 수상 횟수도 단연 으뜸이다. 프랑스어로 표현한 글들이 인류의 영혼으로 스며든 작가들은 너무도 즐비하다. 빅토르 위고, 알베르 카뮈, 알렉상드르 뒤마,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장 폴 사르트르,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샤를 보들레르, 앙드레 지드, 아르튀르 랭보, 샤를 보들레르, 앙드레 말로 등, 실로 다 열거하기도 힘든 대문호들이 즐비하다. 아직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마냥 부러운 문학의 융성이다. 프랑스 문학의 바탕에는 분명 웅장한 ‘톨레랑스’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린 의식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문학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된다. 권력에 대한 투철한 저항의식도 수려하고 희극적인 문학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폭정에 절규하는 프랑스 시민들의 대혁명 현장을 빵을 달라는 타령으로 규정하던 왕비, 마리 앙투아 네트의 희극적 서사만큼이나 말이다.
‘톨레랑스’가 마냥 순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못된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이용될 수 있다.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한 진정성이 배제된 관용으로 악용된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우린 그 역사적 현장을 수도 없이 목도했다. 기득권을 거머쥔 지배세력이 반대세력에게 제한된 관용을 보이는 건 상대의 공격을 무디게 하고 대중으로부터 권력을 정당화하는 극적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략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조차도 침략의 명분을 돈바스 지역의 대승적 평화와 화해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톨레랑스’가 악용된 경우이다.
우린 선거에 있어 후보자 개인의 사생활과 가십거리에 천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보니 후보의 정책과 공약에 대한 검증은 자연스럽게 뒷전이다. 이번 대선을 달구었던 것은 정책이 아닌 가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존중은 물론 사생활과 정치적 능력, 즉 공적영역을 구분하는 프랑스의 문화와는 확연하게 대별된다.
프랑스의 23대 대통령 카를로 사르코지는 대선 투표 날, 부인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이혼선언은 투표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사르코지는 당선 후 취임 5개월 만에 엘리제궁에서 이혼한 첫 프랑스 대통령이 되었고 가수이자 모델인 카를라 브루니와 재혼한다. 그녀는 대통령 체면을 살려주는 선한 활동을 펼치면서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에 안착했다. 그러고 보니 장안의 화제였던 TV 드라마‘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삽입곡이었던 ‘Stand by Your Man’를 부른 가수가 카를라 부르니이다. 태미 와이넷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이 노래는 매혹적인 음색도 그러려니 와 원곡과 확연히 다른 느낌의 분위기로 지친 일상에 평온함을 준다.
사생활은 보호하되 정책에 민감한 시민이 많을수록 정치는 달라진다. 불륜이 아닌 다음에야 정치인의 사생활이 어찌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겠는가. 다름과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면‘톨레랑스’는 없다. ‘스탠 바이 유어 맨’은 카를로 사르코지와 카를라 부르니의 애절한 개인의 사랑으로 인정해 주고 사회 공동체를 이끌 ‘스탠 바이 유어 맨’은 정책과 역량이 되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