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건강보험 개혁안을 들고 나왔지만, 반응이 냉담하다. 재정파탄의 원인으로 의료쇼핑·무임승차, ‘문재인케어’를 지목했지만, 정작 근본적 요인인 ‘진료비 지불제도’에 대한 개편 방안은 내놓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강훈식·남인순·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강은미 정의당 의원과 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 정책연구원은 15일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윤 정부가 내놓은 건보 개혁안 방향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한정애 의원은 “건강보험 개편안을 보면 윤 정권이 건보재정 위기를 환자의 탓으로 여기고 있다”며 “건강보험 지출 요인에 의료서비스 수요자인 환자가 있다면 의료기관과 같은 의료서비스 공급자도 있기 마련인데도, 윤 대통령은 공급자에 대한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에 대해선 말이 없다”고 꼬집었다.
강은미 의원도 “윤 정부는 건강보험 지속가능성을 거론하며 이전의 보장성 강화정책을 재정 악화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하고 비판하고 있다”며 “근본적으로 행위별 수가에 기반한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준현 건강정책참여연구소 소장도 “현 정부의 건강보험 지속가능성 제고 방안은 지출부문 관리에 주안점을 뒀다. 의료남용이나 과다이용 문제를 제기하며 ‘문재인 케어’를 타깃으로 삼았으나, 보다 근본적 문제는 비용의 무한 증식과 과잉 투자를 초래하는 공급구조에 있다. 행위별 수가제가 이러한 구조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한국이 채택하고 있는 진료비 지불제도는 행위별 수가제다. 진료할 때마다 진찰료, 검사료, 처치료, 입원료, 약값 등에 따로 가격을 매긴 뒤 합산해 진료비를 산정하는 제도다. 행위별 수가제가 진료 행위마다 비용을 지불하다 보니, 의료 공급자가 수익 극대화를 위해 환자 1인당 진료량을 늘리는 유인 작용을 촉발한다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 더해 급여비 청구 건수도 늘다보니 심사 물량이 증가해 2020년 기준 심사직원 1명당 연간 213만여 건을 처리해야 하는 수준이다.
행위별 수가제가 건강보험 재정 지출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조희흔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는 “의료 공급자들의 진료 자율권을 보장하고 어느 정도 양질의 보건의료 제공이 가능하다는 이론적 장점은 있다. 그러나 비용 유발적 제도로 시장친화적이고, 사후 지불제도이기 때문에 예방과 건강증진 기능보다는 치료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무엇보다 이윤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과잉진료, 자원낭비 등을 유발해 제도를 악용하는 경우가 발생해 건강보험 재정 지출의 큰 원인으로 지목됐다”고 했다.
현 체제를 유지하다간 건강보험 적립금이 바닥날 위기라는 전망도 나온다. 정형선 연세대 의료복지연구소장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경상의료비 규모는 2000년 25조 원으로 GDP(국내총생산) 대비 4% 수준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2021년엔 190조 원에 이르렀고, 2022년엔 200조 원을 넘어 GDP 대비 10% 수준에 가까워질 것으로 추계된다. 짧은 기간 내 의료비 지출 규모가 빠르게 늘어난 모습이다.
조속히 진료비 지불제도에 대한 칼을 빼들지 않는다면 2030년에는 막대한 규모의 의료비를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소장은 “지금의 의료비 증가 추세가 계속된다면 2030년에는 경상의료비 규모가 400조 원을 넘어 GDP(국내총생산)의 16%에 달할 것”이라며 “의료비 증가 속도를 둔화시키고 건보 지출을 억제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건강보험 급여지출 연평균 증가율을 4.8% 아래로 억제해야 가까스로 2030년 경상의료비를 GDP의 11%로 조절 가능하다”고 피력했다.
의사 인력 부족도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늘리는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 정 소장은 “의사 인력이 부족해 의사 고용계약 단가가 상승하고, 병원 경영의 압박이 오니 결국 수가 인상, 즉 건강보험 진료비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의대정원 축소는 장기적으로 의료의 질 저하에 그치지 않고 의료비 상승과 보험료 인상을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행위별 수가제에서 기인한 과잉의료는 일반 국민들도 우려하고 있는 지점이다. 2022년 통계청 사회조사의 의료서비스 불만족 이유 조사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진료(검사 등)를 많이 한다’라는 답변은 31.6%에 달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건강보험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선 행위별 수가제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안으로는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됐다. 기존 진료비 지불제도에 부가적인 지불제도를 추가하는 방법과 기존 진료비 지불제도를 완전히 대체하는 대안적 지불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기존 행위별수가제를 유지하는 조건에서 일부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김준현 건강정책참여연구소 소장은 “현행 체계를 전제로 한 보완적 지불제도 운영이 필요하다. 행위별 수가제를 완전 대체하는 방식은 아니며, 유형별 환산지수 계약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되 성과평가와 대안적 지불제 도입으로 다변화를 모색하는 방안”이라며 “행위별 수가제는 적용하지 않았던 상대가치 점수, 총점 변동분을 재정중립 관점에서 조정하는 기전을 추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수의료 과목 의사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총액계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총액계약제는 의료행위별로 지불하는 행위별 수가제와 달리 사전에 협상한 총액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지방과 공공의료기관에서 의사 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현행 행위별 수가제 하에서는 의사 수 증가가 이런 결손 부분의 보충으로 직접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며 “무엇보다 행위 자체를 늘리기 어려운 부분에서 결손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현재의 의사결손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병원급 입원진료에선 외상, 응급, 투석, 소아, 분만 등은 총액으로 운영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도 오는 9월 발표할 건강보험 최종 개편안 진료비지불제도 개선책을 포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강준 복지부 보건의료혁신과장은 “9월에 2차 건강보험 종합계획을 세울 예정인데 여기에 보장성 강화 내용을 담도록 돼 있다. 지불보상제도뿐만 아니라 가격결정체계도 손봐야 하는 시점”이라며 “상대가치점수, 환산지수도 종합계획을 세우면서 담겠다”고 전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