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누가 병원을 가? 집에서 확인하지.” 고혈압약을 20년째 복용 중인 71세 이모씨는 최근 새로운 전자혈압계를 구매했다. 오래 전 마련한 수동혈압계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이씨는 “요즘은 전자혈압계도 수동혈압계만큼 정확하다고 들었다. 옛날에는 병원에서도 수동혈압계를 추천했는데, 시대가 변한 것 같다. 전자시계가 있는 사람은 그걸로 혈압을 재기도 하더라. 병원 갈 일이 점점 줄어서 좋다”고 말했다.
초고령화, 만성질환 유병률 증가, 재활치료 필요성 확대 등 최근 건강을 둘러싼 사회적 과제들이 맞물리면서 의료 현장이 변모하고 있다. 병원을 방문해야 진료, 치료, 건강관리가 가능했던 기존 풍경을 뒤로 하고, 집에서 자신의 상태를 직접 살피면서 의사 상담까지 받는 시대, 일명 재택의료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고혈압, 당뇨 환자들의 경우 이미 10여년 전부터 병원이 아닌 집에서 의료기기를 사용해 자신의 상태를 매일 확인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혈압계, 혈당측정기 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외형은 줄이고 편의성을 높였다. 데이터도 정확해져 신뢰감을 더한다. 최근에는 휴대폰과 연동해 건강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살필 수 있고, 신체 이상이 있을 때는 알람이 울려 빠른 인지가 가능해졌다.
지난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은 재택 의료기기 발전에 불을 지폈다. 대면진료로 인한 감염 위험을 막기 위해 비대면진료가 한시적으로 허가됐고, 이에 따라 재택 의료기기 역시 확산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진단키트 또는 환자 체온·산소포화도 모니터링기기 등이 대표적이다. 모바일 앱, 전자시계 등은 수면, 심전도를 포함한 활력징후를 기록하거나 의료진 상담을 이어가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치매환자·독거노인 돌봄로봇, 재활용 의료로봇, 편두통·우울증을 치료하는 머리띠 모양의 의료기기, 헬멧 모형의 탈모 치료기기 등 병원에서만 쓴다고 여겨졌던 다양한 종류의 의료기기가 집으로 들어오고 있다.
의료진 반응도 긍정적… “의사·환자 연결성 향상”
재택 의료기기를 통한 환자 돌봄에 대해 의료진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비대면진료나 의료기기 데이터의 정확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이제는 충분히 안전성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김광준 세브란스 노년내과 교수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의료기기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병원에서 전문가가 의료기기를 사용할 때와 일반인이 쓸 때 측정값 차이가 커 신뢰도가 낮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용법이 간단하고 측정 센서가 발달해 가정에서 의료기기를 사용해도 정확한 값을 도출한다”고 말했다.
이어 “환자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환자들이 먼저 전자시계나 이동형 의료기기를 통해 자신의 데이터를 확인하고 건강을 관리하고자 한다”며 “환자의 건강 데이터가 메일이나 SNS를 통해 자동으로 연계되는 시스템이 생기면서 의사와의 연결성도 좋아졌다. 또한 의료진이 인공지능으로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하고 결과를 낼 수 있어 정확성, 신속성도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집에서 병원까지 거리가 멀거나 거동이 불편한 고령, 장애 환자들을 자주 볼 수 없는 점이 의료진의 걱정을 키우기도 했지만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 이후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 의료진들도 비대면진료, 가정 의료기기 사용 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김 교수는 “노인 환자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은 병원까지 오는데 큰 결심이 필요하고, 보호자들까지 대동해야 한다. 그러나 진료 받는 시간은 3~5분밖에 되지 않는다. 의료기기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시진, 촉진, 청진 같은 이학적인 검사를 하자고 환자를 병원까지 오게 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또 병원에서 이학적인 검사를 얼마나 자주, 제대로 하는지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또 “환자들을 제대로 파악해서 관리한다면 비대면진료와 재택 의료기기의 단점을 극복하면서 환자의 편리성까지 유지할 수 있다”며 “그런 면에서 일부 초진 환자들도 비대면진료로 충분히 의료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언급했다.
“의료기관서 볼 수 있는 데이터 한정”…기기 있어도 활용성 한계
다양한 재택 의료기기의 등장과 이를 활용하려는 환자, 의료진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실제 국내 활용성은 낮은 상황이다. 혈압, 혈당 등의 기록이 지정 의료기관으로 전송되면 상시 모니터링이 가능하지만, 의료법상 이러한 데이터가 의료진에게 넘어올 수 없는 실정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원격진료가 법적으로 도입되지 않았다. 당연히 비대면진료 하위 분류에 속한 원격모니터링도 불가능하다. 원격모니터링은 환자가 병원에 오지 않더라도 전화, 이메일, 앱 등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현재로서는 환자가 디지털기기나 모바일과 연동한 의료기기에서 건강 데이터를 얻어 병원에 전송해도 의사가 이를 통해 환자를 관리하고 상담할 수 없다.
기기의 활용 폭이 단순히 개인이 알아서 하는 건강관리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의사들도 비싼 의료기기를 굳이 환자에게 추천할 이유가 없다. 회계·경영 컨설팅 전문 기업인 삼정KPMG가 지난 2020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상위 100대 기업 중 63개사가 국내 규제로 인해 한국에서의 사업이 제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관계자는 “가정용 의료기기 품목은 다양해지고 수요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의 발전으로 원격모니터링이 가능한 제품들도 있지만, 여전히 규제에 막혀 시장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비대면진료를 법제화하는 것이 우선 해결과제이며 수가 반영, 규제 완화 등도 뒤따라야 한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현 정부에서 비대면진료의 제도화 과정이 더딘 것은 아니다. ICT를 적용한 원격모니터링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의료기기를 허가하고, 가이드라인 구축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제도화 과정에서도, 또 이후에도 몇 가지 해결과제는 있다.
김광준 교수는 “최근 정부도 비대면진료 법제화를 추진하며 적극적으로 법을 개선해나가고자 한다. 이제는 원격모니터링이 불가능해서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없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비대면진료를 초진·재진으로 분류해 실제 의료환경과는 동떨어진 제도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대면과 비대면의 선택 자유권은 환자와 의료진에게 있다.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대면 초진이 확실히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비대면진료 서비스가 건강한 사람을 중심으로 고려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실질적으로 비대면진료, 그리고 의료기기가 필요한 사람들은 노인들이다. 그들의 디지털 사용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비대면진료 사업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제도화에 앞서 이들이 우선적으로 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노인들도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기기를 사용하려는 의지도 강하다. 이들에게 어떤 서비스를 어떻게 제공할지,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소재는 어디에 둘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