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지은 건물이 없고 모두 낡고 오래된 낡은 건물들만 있다 보니, 환한 기억이나 좋은 기억들이 별로 없는 공간이 여기 저기 가득하다.
어릴 적부터 어느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했고, 경제 능력과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어른아이’ 같은 친구들이 많은 하월곡동 88번지.
악쓰고 싸우는 사람들도 많고, 차마 귀로 듣기 힘든 욕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차갑고 아픈 감정들이 온 동네를 떠돌고 있다.
밝음보다는 어두움이 많은 동네에 빛나는 무언가가 이 어두움을 조금이라도 해결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했으나 내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즈음 나는 새로운 기운과 맑은 기운을 만들어내는 나무와 풀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나무 모종을 사고, 다양한 다육이 화분을 샀고, 꽃씨를 얻어 싹을 틔우고 다양한 기운을 가진 식물을 모아 초록공간을 만들었다.
십여 년 전 부터 ‘건강한 약국’ 바깥공간은 향기와 푸르름으로 가득 찼다. 추운 겨울을 잘 버티어 낸 라일락 나무가 이제 서야 연보라 빛의 꽃송이를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다.
햇살 가득한 골목 안 라일락나무는 한 달 전에 꽃이 피었고 그 귀한 향기로 온 골목을 가득 채웠다. 골목을 오가는 행인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다.
다른 곳에 있는 라일락보다 한 달이나 늦게 꽃을 피우는 약국 앞 라일락나무. 혹독한 차가운 바람을 온 몸으로 다 부딪혀 겨울을 보냈기에 봄을 맞이하여 수액을 뿌리 끝에서부터 작은 가지 끝까지 보내어 잎을 올리고 꽃을 피우는 라일락 나무의 열심을 보는 일은 참으로 좋다.
아직은 작은 싹에 불과한 풍선초와 유홍초도 여린 새 잎을 열심히 밀어내고 있다.큰 열매와 꽃을 자랑하는 작두콩 씨앗도 열 알이나 심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교회 김 집사님한테 작두콩 모종을 두 개 얻어 큰 화분에 옮겨 심었다 여기 저기 움직이고 일하는 봄의 기운이 하월곡동 88번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하월곡동 88번지의 공중정원’이란 별호를 붙여준 ‘보살이모’의 꽃밭은 우울하고 쓸쓸했던 겨울의 기운을 싹 몰아내고 생기 가득한 밭으로 변하고 있다.
정말 다양한 식물을 재배하는 부지런한 보살이모. 열무 오이 호박 가지 고추 상추 방풍나물 등등이 상쾌한 출근길의 좋은 친구로 하루의 시작을 산뜻하게 만들어 준다.
하월곡동 88번지에서는 사람의 삶과 초록의 삶이 어울려 서로를 위로하며 좀 더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약사 이미선
1961년 생.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태어나 현재 하월곡동 88번지에서 26년 째 '건강한 약국' 약사로 일하고 있다. '하월곡동 88번지'는 소위 '미아리텍사스촌'으로 불리던 집창촌이다. 이 약사는 이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약사 이모'로 불린다. 그들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도 취득하여 주민 상담, 지역 후원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ms644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