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혁신의료기기의 건강보험 임시등재 의사를 내비친 가운데, 이를 두고 시민단체와 산업계의 입장 차이가 두드러졌다. 시민단체는 안전과 효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며 보험 적용을 반대한다. 산업계는 위해도가 낮을뿐더러 정부로부터 입증을 받아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의견이다.
지난 26일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제13차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열고 오는 9월까지 디지털 치료기기, 인공지능(AI) 영상진단 의료기기에 대해 건강보험 적용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혁신의료기술을 활용하는 경우 최대 3년의 사용기간 내에 건강보험 임시코드를 부여해 한시적으로 비급여 또는 선별급여를 적용한다. 정식 등재 시 급여 여부와 수가를 최종 결정하게 된다. 선진입, 후평가 제도인 셈이다.
이를 두고 시민단체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같은 날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이하 무상의료운동본부)는 성명서를 내고 “검증되지 않은 AI, 디지털치료기기를 건강보험에 적용해 환자 진단과 치료에 시험 삼아 써본다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무상의료운동본부는 혁신의료기술평가 제도 자체를 문제로 지목했다. 혁신의료기술평가는 2019년 3월 복지부가 혁신적인 의료기술의 조기 시장 진입을 위해 도입한 제도다. 임상 문헌 근거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신기술의 잠재성이 높은 경우 조건부로 임상 현장에서 일정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31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의료기기나 의약품의 안전성과 효과성을 입증할 때는 거쳐야 할 관문이 있는데, 정부는 위해성이 낮다며 오히려 규제를 풀어주고 있다”면서 “신기술일수록 위험성을 예측할 수 없어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AI로 학습된 데이터가 왜곡돼 있을 가능성은 왜 배제하는가”라고 피력했다.
전 정책국장은 2016년 국내에 도입됐던 IBM의 ‘왓슨헬스’ 사례를 예로 들었다. 암 진단기기 제품인 왓슨헬스는 진단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많은 병원이 도입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몇 년 뒤 효과성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전 정책국장은 “결국 IBM이 담당 사업부 매각까지 결정했지만 환자에 대한 보상이나 진료 평가는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짚었다.
이어 “혁신기술이 인체 침습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위해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부정확한 진단, 또 그로 인한 치료 지연과 잘못된 처방 등이 생길 경우 환자에게 어떤 악영향이 있을지 모르는 것”이라며 “기업이 직접 투자해 환자 접근성을 확대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와 환자의 자금을 통해 효과성 입증에 필요한 데이터를 모으겠다는 것은 문제가 크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처럼 중요한 사안을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보고안건으로 처리해 논의와 표결조차 할 수 없게 한 것도 큰 우려를 낳는다. 사회적 공론화와 시민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반면 산업계는 정부 주도 하에서 혁신의료기술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고 반박한다.
디지털 치료기기를 개발하는 A업체 관계자는 “혁신의료기술로 지정돼 환자에게 적용될 때는 이미 식약처 인허가를 통해 안전성을 검증 받은 상태다”라며 “비침습성 기기라 위해성이 낮으며 의료기기 등급별로 별도 평가를 받아야 하는 만큼 유효성도 높다. 데이터가 부족해 검증되지 않는 경우 의료기술 제도에 따라 정해진 제한적 조건 하에서 사용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다만 산업 발전에 있어 보험이란 틀은 필요하지만 실제 적용 시 개선돼야 할 부분은 있다고 공감했다.
의료 AI 진단기기 B업체 관계자는 “제한된 건보 재정을 검증되지 않은 기술에 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지적에 동의한다.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의료 AI, 디지털 치료기기에 대한 정식 급여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며 “임시등재 방안을 통해 지원되는 건보 재정은 10%로 기업에게 미치는 경제적 효과는 비급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차라리 정식 급여 절차를 마련해 치료 효과, 비용 효과성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제기했다.
디지털 치료기기 C업체 대표는 “건보 재정에 부담을 주는 상황은 업계도 원하지 않는다. 보험 적용이란 의미 자체는 혁신의료기술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고 근거를 입증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든다는 것인데 이번 임시등재가 업계 매출에는 사실상 큰 영향이 없다”며 “오히려 정부에 내야할 더 많은 서류들이 생기고,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신의료기술과 별개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 불면증, 우울증 등에 대한 디지털 치료기기의 경우 인지행동치료 상담을 디지털로 효율화하고, 그 효과를 식약처에서 검증받은 ‘기존 기술’로 봐야한다. 이런 디지털 기술들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 관리 받는다는 취지로 보는 게 옳다. 이를 신의료기술로 분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임시등재에 앞서 어디까지 신의료기술로 볼 것인지는 정부는 고민해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업계, 의료계 등의 의견을 수렴해 임시등재 방안을 적용할 계획이다. 복지부 보험급여과 관계자는 “공식적인 입장을 줄 순 없지만 시민단체가 우려하는 부분은 알고 있다”며 “여러 방면을 고려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전했다.
앞서 7월18일 트레이시 메를린(Tracy Merlin) 의료기술평가국제협의체(INAHTA) 회장은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함께 참여한 국제 신의료기술평가 네트워크 총회에서 “한국의 선진입 제도는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인다. 다만 선진입 제도를 통해 수집되는 임상 자료들이 안전성 측면에서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예측되지 않은 안전성 문제가 발생하거나 효과적이지 못할 경우 중단이나 철회를 할 수 있는 엄격한 기준을 명확하게 갖춰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 바 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