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컨슈머가 된 환자들 [취재진담]

블랙컨슈머가 된 환자들 [취재진담]

기사승인 2024-09-13 06:00:07
몇 달 전, 부모님의 지인 A씨가 ‘억울하다’며 기자를 찾아왔다. 서울 지역 한 상급종합병원에서 유방암을 진단 받고 수술을 진행했는데, 의사 과실로 4차례나 더 수술을 받아야 했다는 사연이었다.

A씨는 유방절제술과 전이를 예방하기 위한 난소절제술까지 하기로 했다. 의사는 계획했던 절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수술 이틀 째,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급하게 영상진단검사에 들어갔다. 요관이 잘린 채 배 속에 소변이 새고 있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요독증, 복강 내 감염 등으로 심각한 상황에 이를 수 있었다. 

“설마 병원 측이 과실을 인정하지 않은 건가요?” 기자의 물음에 A씨는 그건 아니라고 답했다. 병원은 신속하게 법무팀을 통해 환자에게 과실을 인정하고 요관을 봉합하는 수술을 무료로 진행해줬다. 의료진이 타 환자보다 더 자주 A씨 상태를 확인하는 등 의료서비스도 충실히 제공했다고 A씨는 말했다. 그러나 A씨는 2번의 개복술과 협착된 요관을 뚫기 위한 2차례의 스텐트 삽입술을 받아야 했다. 또 지속된 통증으로 요양병원 생활을 2달이나 이어가야 했다.

A씨는 막상 수술을 받고나니 억울해서 이대로는 보상을 만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추가적 피해보상을 병원에 요구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퇴원 후 병원측에 소송을 걸었다. A씨는 “병원은 약속한 보상을 다했다며 나를 ‘블랙컨슈머’(진상고객, black consumer)로 취급했다”며 “단 한 번의 수술이면 금방 회복했을 환자는 먹고 자는 것조차 힘든데 그에 따른 피해는 누가 책임지나. 죄송하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라고 토로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을 두고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고 부른다. 경제학 개념에서는 ‘한 사람의 숨겨진 행위로 인해 상대방이 비용을 추가로 부담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앞서 말한 사례를 비추어보면 ‘상대방’은 병원으로 볼 수 있다. 병원 측은 환자에게 제시한 대로 보상을 제공했지만, 그럼에도 환자가 병원측을 고소하거나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등 정부기관에 보상 신고를 접수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의약품 부작용 피해구제 제도 틀 안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피해구제 심의위원회 소속의 한 관계자는 “이미 병원에서 부작용으로 보상을 받은 환자가 정부에 피해구제를 신청하거나, 피해구제 제도를 통해 보상을 받았음에도 병원측에 소송을 거는 도덕적 해이 사례가 많다”면서 “특히 코로나19 이후 백신 접종 관련 부작용으로 중복 신고하거나 중복 지원 받은 사례가 급증했다”고 언급했다.

반면 환자단체는 피해를 금전적 규모로 정의할 수 없는 만큼 ‘도덕적 해이’라는 용어를 쉽게 사용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지난 4일 의약품 부작용 피해구제 지원제도 10주년을 맞이해 열린 포럼에서 양현정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이사는 “물론 피해구제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환자들은 의약품 부작용으로 인해 사회생활을 할 수 없어 금전적으로 피해를 보고, 그를 돌봐야하는 가족들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이 미친다”며 “그들의 신체적·정신적 고통까지 고려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 보상이 정말 충분했는지는 당사자 아니면 누구도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정부, 의료기관, 제약사, 환자 모두 다 같은 이익집단이다. 따라서 누가 옳다 그르다라고 편을 들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단 한 가지 사실은 환자가 피해자라는 점이다.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할 존재고,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이다. 속사정을 모른 채 추가적 보상을 요구한다고 해서 도덕적 해이라고 쉽게 손가락질해선 안 된다. 평가 기준에 따른 보상에만 중점을 둔 피해구제 보상 제도도 개선이 필요한 때다.  

가장 평화로운 해결책은 ‘예방’이다. 의료사고도, 의약품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 물론 피해를 보상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긴 시간과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많은 의료사고와 부작용 데이터를 쌓아왔다. 피해 예방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산하 기관들도 있다. 예방책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기반은 충분하다. 정부의 관심과 예산 지원만 확대된다면 환자들이 블랙컨슈머를 자처하는 일도, 도덕적 해이를 문제 삼는 일도 사라질 수 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
박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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