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재정의 기금 고갈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국고를 투입해 기금 소진을 늦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 해외 공적연금과 비교해도 한국의 재정 지원은 낮은 편이다. 특히 국고를 투입하면 연금 수령액을 깎는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17일 김남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받은 국민연금 재정 시뮬레이션 자료를 보면, 연금 지급액이 보험료 수입액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되는 2036년부터 매년 국내총생산(GDP) 1%의 국고를 국민연금에 지원할 경우 국민연금 기금 소진 연도가 2091년으로 연장된다. 이는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연금개혁안(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2%, 기금운용수익률 5.5%)을 적용해 추계한 결과다.
국고 투입 규모를 늘리면 연금 수령액을 삭감하는 ‘자동조정장치 도입’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금 소진 시점을 늦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자동조정장치 도입을 제안했다. 변수에 따라 보험료율이나 소득대체율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자동조정장치는 기금 고갈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자동으로 납부액을 올리고 수급액을 줄일 수 있게 설계된다.
정부는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면 기금 고갈을 2088년으로 연장할 수 있다고 전망했는데, 국고 투입이 이뤄지면 2091년으로 3년 더 늦출 수 있다. 쉽게 말해 연금 수령액을 깎지 않아도, 국고 투입이 이뤄지면 국민연금 기금 고갈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한국의 국고 투입 규모는 해외에 비해 적은 편이다. 독일의 경우 연금액이 낮은 가입자에 대한 보충연금 등을 국고로 지급해, 2022년 연금 수입의 22.7%를 정부가 메웠다. 스위스 역시 연금 급여는 물론 국민연금 가입 기간을 추가 인정해주는 ‘연금 크레딧’에 국고를 지원한다. 올해 기준 연금 지출의 20.2%를 국고로 충당했다. 한국도 국고가 일부 투입되지만, 국민연금 기금 1191조원 중 국고보조금은 7440억원으로 전체 기금의 0.006%에 불과하다.
국민 여론도 정부가 국고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다. 지난 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 시민평가단의 80.5%는 “사전적 국고 투입을 통해 미래 세대의 과도한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또 연금 크레딧 재원의 전액을 국고로 전환해야 한다는 응답도 88%에 달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국고 투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고를 투입하면 자연스럽게 세대별, 소득계층별 차등 부담이 실현된다”며 “조세 부담을 연령대별로 구분해 보면 40대 이상이 총근로소득세 납세액의 78.9%를 부담한다. 소득분위별로도 상위 10%(10분위)가 총근로소득세의 73.1%를 납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도 연금 재원 마련을 위해 ‘목적세 신설’ 필요성을 피력해 왔다. 그는 지난 8월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15% 수준의 보험료 상향이 어렵다면, 목적세를 신설해 보험료율 2%p 정도의 부족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며 “(목적세 신설을 통한) 국고 투입은 기금 고갈 이후 급여지출 충당용이 아니라 상당 규모의 기금적립금 유지를 위한 사전적 투자이므로, 당장 투입해서 기금적립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우창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2030년 GDP의 1% 정도인 22조원가량을 투입해야 한다고 제안해 왔다. 그간 정부가 연금개혁을 차일피일 미루며, 5년마다 균형상태 부담이 GDP의 0.5%씩 증가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정부가 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기금이 바닥나면 미래에는 연금 제도 유지를 위해 재정 투입이 불가피한 만큼 미래 세대 정부의 지출 부담을 현 세대에 나눠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정부안대로 처리해도 2088년엔 기금이 소진된다. 언젠가는 무조건 재정 투입이 이뤄지게 된다”면서 “문제는 재정 투입 시점이다. 세대 간 형평성을 도모할 수 있는 타이밍이 언제인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정부가 GDP의 1%를 국고로 투입하면, 다음 정부도 1%만 충당하면 된다. 그러나 이번 정부가 다음 정부에게 떠넘긴다면 기초연금까지 포함해 GDP의 10%를 연금 제도 유지를 위해 부담해야 한다. 이는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절반에 달하는 수준”이라며 “선제적으로 투입할수록 미래세대의 부담이 줄어들 수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