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국내 석유화학업계를 위한 종합지원대책이 올해 안에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당초 6월말로 예정돼 있었던 대책 발표가 늦어진 만큼 급격한 시장 악화에 따른 실효성 있는 방안 마련이 시급한 가운데, 업계와 정부 사이 공정거래법 한시 완화 여부가 쟁점이다.
10일 석화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관계부처와 석화업계 정책금융 지원, 중장기 사업 재편 인센티브 등 방안을 논의해 이르면 이달 중 석화산업 재편 관련 제도적 지원 방안 등 종합지원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올해 말, 이렇게 정확히 날짜가 정해진 것은 아니나 석화업계의 위기를 인지하고 실효성 있는 방안을 머지않은 시점에 내놓기 위해 소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부는 지난 4월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 협의체(TF)’를 출범, 업계 논의를 거쳐 중장기 전략을 포함한 종합지원대책을 6월 말쯤 내놓기로 했었으나, 주요 기업과 다운스트림 중견·중소기업 등 이해관계자 간의 의견을 취합하기 어려워 계획이 일차적으로 무산된 바 있다.
그 사이 반년의 시간 동안 석화업계 부진의 늪은 더욱 깊어졌다.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등 주요 석화기업은 3분기 모두 석화부문에서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유일한 흑자였던 금호석유화학도 영업이익(651억원)이 전년 동기 대비 22.7% 감소했다.
지난해 부임한 이훈기 사장이 1년 만에 용퇴한 롯데케미칼은 이달 초 여수 2공장 내 에틸렌글리콜(EG)과 산화에틸렌유도체(EOA)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하기 위한 박스업(철수 전 정리) 절차에 돌입했다. 매각 추진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2공장 근무자 70여 명이 전환 배치될 예정이어서 재가동 가능성은 낮은 상태다. 롯데케미칼은 앞서 상반기 페트(PET) 생산도 중단했다.
업계 ‘맏형’ LG화학 역시 스티로폼의 원료 스티렌모노머(SM)와 에틸렌옥시드(EO), 에틸렌글리콜(EG) 생산라인 가동을 줄줄이 중지했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 각각 여수 NCC(나프타분해설비) 제2공장, LC타이탄 등 대규모 생산시설 매각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나 사실상 인수자를 찾기 힘든 상황이다.
업계에선 이전에 논의됐던 금융 지원, 세제 혜택 수준을 넘어 기업 간 구조조정을 위한 직접적인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청한 석화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저수익 사업과 비핵심 자산을 매각하고, 고부가가치 생산라인 전환에 투자하는 등 사업 재편 노력을 이어가고 있는 만큼, 정부도 현재 업황을 고려해 일시적으로 규제를 완화해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정부와의 대화 자리에서 여러 차례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독과점, 형평성에 관한 문제는 M&A 이후 생산 구조 개편 등 추가적인 조건을 달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특정 거래 분야에서 시장점유율이 1위이거나 시장지배적 사업자 요건(점유율 50% 이상)에 해당할 경우 기업 간 결합을 독과점 행위로 간주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조치 대상이 된다. 석유화학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의 경우 LG화학, 롯데케미칼 두 곳의 국내 생산점유율만 44%(26%+18%)로 추정되고 있다.
산업부와 공정위는 이처럼 특혜 우려 등 형평성 문제, 국제 기준과의 차이, 관련 사례가 전무한 점 등을 들어 공정거래법 완화가 당장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다만 최근 업황 부진이 매우 심각해지면서, 우리보다 먼저 이러한 위기를 겪었던 일본의 사례를 연구하기 위한 용역을 지난달 11일 긴급 발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단 파악은 해보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산업부는 ‘일본 석유화학 주요 정책 및 현황 조사 연구’ 용역을 통해 △2010년대 이후 사업 재편 과정에서 공정거래법 쟁점 △지역별 석유화학산업단지 내 협력사업(RING) 진행 상황 및 공정거래법 쟁점 △사업 재편 활성화를 위한 일본 정부 규제 개선 사례 등을 구체적 연구 과제로 지정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글로벌 업황 자체가 둔화된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사업 재편을 추진 중인 일본 석화산업 현황을 조사해 국내 업계 경쟁력 제고 정책에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오일쇼크’ 여파로 수익성이 악화한 1980년대 초부터 공정거래법 적용을 석화산업에 한시 유예하는 등 방식으로 구조조정과 M&A를 통한 사업 재편을 추진해 왔다. 1994년 미쓰비시화성과 미쓰비시유화가 합병해 탄생한 미쓰비시화학, 1997년 미쓰이석유화학과 미쓰이도아쓰화학이 합병해 탄생한 미쓰이화학 등이 그 예다. 이들은 M&A 과정에서 군살은 빼면서도 범용 제품 비중을 평균 40%대까지 줄였다. 현재 한국 기업은 60%대로 집계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연구용역 결과가 내년 2월 이후에나 나올 예정이어서, 이번 지원대책에 공정거래법과 관련된 솔루션이 담기기엔 어렵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말 시급한 상황이지만, 그나마 정부에서 업계 입장을 수용·반영해가고 있다는 점 자체는 일단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금융 지원, 세제 혜택 등 실효성 있는 지원책을 토대로 향후 M&A와 관련된 추가 방안들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고, 기업들 역시 정부의 노력에 부응하기 위해 자구노력을 더욱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