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가 출범하고 ‘신약 혁신 가치 반영’, ‘중증·희귀질환 치료 보장성 확대’ 등의 내용을 아우른 2차 건강보험종합계획이 발표되면서 환자 중심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정부는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들을 위해 신약이 신속하게 등재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도입하고, 치료제의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하기 위해 재정을 적극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힘든 투병 과정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환자들에게 희망이 된 이 약속은 현재 어떻게 이행되고 있을까. 한국의 신약 도입 현황과 급여 현실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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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중증·희귀질환 신약의 신속한 급여 등재를 위해 적극적 지원을 약속했지만, 급여 통로는 점차 좁아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는 고가의 신약을 도입할 수 있는 경로인 ‘경제성평가 자료제출 생략제도’가 축소될 경우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이 더욱 제한될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는 중증·희귀질환 신약과 관련된 건강보험 시스템을 정비하기 위해 논의를 진행 중이다. 특히 효과가 뛰어난 신약의 급여 적정성 평가 과정에서 경제성평가를 생략하던 제도를 유예제도로 변경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성평가 자료제출 생략제도(경평 생략제도)는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비용효과성 평가 중심의 국내 보험 정책 환경에서 희귀질환과 희귀 암 환자들이 필요로 하는 치료제에 급여가 적용될 수 있도록 정부가 마련한 제도다. 이는 환자의 치료 접근성 향상에 기여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유전성 망막질환 유전자치료제인 ‘럭스터나’(성분명 보레티진네파보벡)의 경우 한 번만 투약하면 영구적인 시력상실을 막고 빛을 감지하는 능력을 회복시키는 신약이다. 하지만 럭스터나를 적용받을 수 있는 유전성 망막질환을 가진 환자는 극소수이고, 비교할 수 있는 의약품도 없어 가격경쟁력을 입증하기 어렵다. 게다가 양쪽 눈을 치료하는 데 약 7억원이 드는 고가의 의약품으로 현행 경제성평가 평균값(약 4000만원)을 훨씬 벗어난다.
의료계는 환자를 위해 럭스터나의 급여 필요성을 제기했고, 정부도 이에 공감해 지난해 2월 경평 생략제도로 급여를 인정했다. 김상진 삼성서울병원 안과 교수는 “치료제가 만들어진 후에도 비용 문제 때문에 실제 치료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은데 럭스터나가 급여화되면서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얻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경평 생략제도를 거쳐 급여 목록에 등재된 의약품의 비용효과성에 대한 사후 관리가 미흡하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 2015년부터 2024년 7월까지 경평 생략제도를 통해 등재된 신약은 총 39개로, 대부분 수억원에 이르는 약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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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평원이 주도해 2023년 말 전해진 ‘의약품 경제성평가 자료제출 생략제도 개선방안 마련 연구’ 결과를 보면 경평 생략제도 도입 이후 약제비를 비롯한 재정 부담이 커졌다. 또 후발 약제가 경제성평가가 생략된 의약품과의 비교 과정을 갖고 시장에 진입하면서 경제성이 입증되지 않은 의약품이 확산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해당 연구를 진행한 연구팀은 경평 생략제도를 ‘경제성 입증 유예제도’로 재설계할 것을 제안했다. 유예제도는 현행 경제성평가에서 자료제출 생략이 가능한 의약품 중 사후 경제성 입증 허용 영역 외에는 등재 시 경제성 입증이 필요한 영역으로 재설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후 경제성 입증이 허용되는 영역은 기대여명이 2년 미만이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이나 대체 치료법이 없는 질환이다.
더불어 연구팀은 경제성평가 생략을 위한 환자 수 요건에 대해서도, 투약 가능한 환자 수가 아닌 질환 자체 유병 인구를 살필 것을 권장했다. 예를 들어 위암 치료제를 경제성평가 생략 의약품으로 인정할 때 그간엔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실제 이 약을 투여할 수 있는 환자가 200명 이하라면 통과 기준에 부합했지만, 개선안에서는 의약품의 적응증인 위암을 겪는 환자 수가 200명 이하여야 적용이 가능하다. 즉, 경평 생략제도가 아우르는 의약품 기준을 강화해 대상 범위를 축소하자는 것이다.
업계는 경평 생략제도가 신약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만큼 개선 방향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우리나라 약가는 경제성평가에 신약의 혁신성, 질병 위중도, 환자 삶의 질, 사회경제 부담 등 사회적 가치가 반영되지 않는 제도적 한계로 인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40% 가까이 저렴한 수준으로 책정돼 있다. 아울러 신약 등재를 위해 경제성평가를 받는다 해도 평가의 기준이 되는 의약품의 비용효과성 평가값(ICER 임계값)이 낮게 형성돼 있어 등재 가능한 약제가 한정적이다.
제약업계 관계자 A씨는 “국내 시장은 약가가 지나치게 낮고, 환자 수가 충분하지 않아 위험분담제가 효과적으로 추진되기 어렵다”라고 전했다. 이어 “희귀질환 신약을 국내에 도입할 수 있는 방법은 경평 생략제도밖에 없다”면서 “환자들의 치료 여건이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평 생략제도를 축소하면 접근성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피력했다. 제약업계 관계자 B씨는 “경제성 입증 유예제도는 중첩적이고 반복적인 사후 관리가 이뤄지면서 약가를 지속해서 낮출 것”이라며 “제약사들이 원가를 정상적으로 보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짚었다.
2차 건보종합계획 ‘신약 접근성 확대’ 약속…“신약 가치 고려한 제도 마련해야”
정부는 지난 2023년 12월 ‘신약의 혁신가치 반영 및 보건안보를 위한 약가 제도개선 방안’을 내놓고, 급여 관련 규정을 개정해 2024년 1월부터 경평 생략제도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개정 이후 경평 생략의 조건으로 투약 가능한 환자 수를 200명으로 제한함에 따라 희귀질환자들의 치료제 접근성은 줄어들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경평 생략 대상 의약품은 총 15개였으나, 개정된 규정을 적용하면 그 중 13개만 요건을 충족해 경평 생략 대상 의약품 수가 축소될 수 있다.
지난해 발표한 2차 건강보험종합계획 내용도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생존을 위협하는 질환을 치료하는 신약에 대해 등재 속도를 현행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혁신성을 인정받은 약제에는 탄력적으로 ICER 임계값을 적용할 방침이라고 밝혔지만 실제로 이를 적용한 사례는 극히 적다. 지난해 2월부터 올해 2월까지 경평을 신청한 의약품 중 탄력적 ICER 적용을 받아 급여권에 진입한 의약품은 1개에 불과하며, 약가 등재를 위한 소요시간은 여전히 오래 걸린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는 “경제성평가 생략 대상의 진입 장벽을 높인다면 희귀질환 치료제의 건강보험 등재는 사실상 불가하다”며 “재정 측면보다는 ‘치료 효과성이 뛰어난 중증·희귀질환 신약에 대한 환자 접근성 향상’이라는 제도의 취지에 부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헌제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연구개발진흥본부장은 “현행 약가제도는 선별등재 방식으로, 약이 시장에 나오기 전에 ICER 기준의 경제성평가를 통해 약가를 산정하고 가격을 통제한다. 이로 인해 신약 접근성에 문제가 발생했다”며 “경제성평가 외 신약의 혁신성, 질병 위중도, 사회경제 부담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한 신약 가치 기반 약가제도의 정착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정부는 논의를 거쳐 신약 관련 급여 제도를 개선해 나갈 계획이다. 심평원 관계자는 “2023년에 나온 연구 결과만을 반영해 급여 제도를 바꾸겠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신약 접근성을 제고하면서 건강보험 급여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보건복지부와 지속적으로 논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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