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문턱’에서 환자 살렸는데”…법정 서는 의사들 [의료 난맥④]

“‘죽음 문턱’에서 환자 살렸는데”…법정 서는 의사들 [의료 난맥④]

기사승인 2025-03-13 11:00:07
의과대학 입학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대치가 계속되는 사이 의료의 질은 떨어졌으며, 환자들은 응급실을 찾아 헤매고 암 수술을 미루는 등 피해가 쌓였다. 전공의가 병원을 이탈하면서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자부하던 한국 의료는 휘청였다. 의료현장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탄식이 나온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한숨이 깊어지는 가운데 지속가능성을 불어넣기 위해 짚어야 할 한국 의료의 민낯을 일곱 편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의료소송에서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 형사 처벌이 이어지고 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고난도·고강도 업무에 의료소송 부담까지 가중되면서 필수의료를 포기하는 일이 빚어진다.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에 힘써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의료사고에 따른 민·형사상 소송 부담은 의사들이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과를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다. 대표적 의료소송으로는 지난 2017년 12월 이대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NICU)에서 발생한 신생아 집단 사망사건이 꼽힌다. 이 사건으로 의사 4명과 간호사 3명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이들 중 일부는 구속까지 됐다. 5년을 끌어간 재판에선 1심과 2심에 이어 대법원까지 의료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의료진이 감염 관리 주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 점이 있지만, 의료진 과실 때문에 신생아들이 사망했는지는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대목동병원 사례는 의사들이 위험 부담이 큰 의료행위를 기피하는 현상을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저출산과 맞물려 소아청소년과를 전공하려는 의사는 급격히 줄었고, 소아를 담당하는 다른 진료과도 타격을 입었다. 2018년 100%를 상회하던 소청과 수련병원 전공의 지원율은 2019년 80%, 2020년 74%로 점차 떨어지다가 2021년 38%로 내려앉았다. 이후에도 반등하지 못하고 2022년 27.5%, 2023년 15.9%로 하락세를 보였다.

산부인과도 의료소송에 자주 휘말린다. 2023년 3월 수원고등법원은 분만 과정에서 영구 장애를 입게 된 산모의 가족이 의료기관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병원 측에 10억6180만원과 함께 2016년 2월부터 발생한 이자를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병원 의료진이 산모에게 발생한 대량 출혈을 늦게 확인한 과실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같은 해 7월엔 수원지방법원이 뇌성마비로 태어난 신생아의 부모가 산부인과 의사에게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부모 측의 손을 들어 12억여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최근 결혼을 하는 나이가 늘고 출산 연령이 오르면서 고위험 임신 위험이 증가하자 분만의료 기피 양상은 뚜렷해졌다. 대한산부인과학회가 2023년 전국 산부인과 전문의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38%는 ‘의료사고에 대한 우려와 분만 관련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분만을 그만뒀다고 답했다. 분만의료 사고는 의료인이 주의와 의무를 다했더라도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통계를 보면,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일어난 불가항력 분만 사고는 총 77건이다. 산모 사망이 29건으로 가장 많았고, 뒤이어 신생아 사망(27건), 태아 사망(11건), 신생아 뇌성마비(10건) 순이다. 이에 정부는 불가항력 분만 사고의 보상금 한도를 최대 3000만원에서 최대 3억원까지 상향 조정했다.

잇따르는 의료소송…“필수의료 의지 갖기 힘들어”

치료 도중 환자가 사망한 사건에 대해 의료진 과실을 인정하는 판결도 잇따르고 있다. 2017년 10월 데이트 폭력을 당해 병원에 이송된 한 환자는 뇌 CT(컴퓨터단층촬영) 검사 결과 후두부 열상, 경막외출혈 등의 소견을 받았다.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두개골을 절제해 혈종을 제거하는 수술에 들어갔는데, 마취과 전공의가 내경정맥(속목정맥)으로 중심정맥관을 삽입하는 과정에서 동맥에 1~2㎜ 정도 관통상이 발생했고 과다 출혈로 숨졌다. 광주고등법원은 지난 2월5일 데이트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를 치료한 의료인 및 병원의 공동불법행위가 성립된다며 공동손해배상 판결을 선고했다. 피해자의 수술은 불가피했지만 전공의의 의료과실로 결국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법원 전경. 쿠키뉴스 자료사진

대한의사협회는 이번 판결에 따라 젊은 의사들의 필수의료 기피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의협은 “정맥천자를 하다가 주변 동맥이 손상될 확률이 1.9~15%인데, 법원은 대량 출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점을 근거로 시술을 담당한 1년차 전공의의 과실을 인정했다”며 “의료사고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발적으로 필수의료를 수련할 의지를 갖는 것을 기대하긴 힘들다”고 주장했다.

박수현 분당차병원 소아응급센터 교수는 “소송은 한번 시작되면 오래가기 때문에 전공의의 경우 수련이 끝나면 병원에서 보호받기 어려울 수 있다”며 “진료, 수술 일정 등으로 인해 개인이 변호사를 고용해 소송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버겁다”고 말했다. 이어 “형사 처벌을 받게 되면 사람을 죽였다는 사회적 시선과 비난을 감당하며 오랜 시간 마음고생을 하게 되고 결국 진료에 소극적 자세를 갖거나 그 길을 포기하기도 한다”면서 “필수과 의사들은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차마 후배들한테 와서 헌신하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의사 과실치사죄 기소 연평균 754.8건…일본의 14.7배

국내 의사의 업무상 과실치사로 인한 기소 건수는 해외 선진국들과 비교해 높은 수준이다. 의협 의료정책연구원이 2022년 발간한 ‘의료행위의 형벌화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13~2018년 검사가 의사를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기소한 건수는 연평균 754.8건이었다. 하루 평균 2명이 의료과실로 기소된 셈이다. 이는 같은 기간 입건 송치 건수가 연평균 51.5건인 일본보다 약 14.7배 많은 수치다. 독일의 의료과실 인정 건수인 28.4건과 비교하면 26.6배 많다. 영국은 의사가 과실치사죄로 기소되는 건수가 연평균 1.3건에 불과했다.

2013~2018년 연평균 의사 업무상과실치사상죄 기소 건수.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과실치사죄로 형사 처벌을 받는 비율도 우리나라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2010~2020년 과실치사죄로 1심 형사 재판을 받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는 모두 354명이며 이 중 67.5%인 23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일본은 1999~2016년 과실치사죄로 형사 재판을 받은 202명 중 15.8%인 32명만 유죄가 인정됐다. 영국의 경우 2013~2018년 과실치사죄로 형사 재판을 받은 의사는 7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4명이 유죄를 받았다.

의료 현장에선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며 고의가 아님에도 과실이라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가혹하다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경기 지역 종합병원 산부인과의 A전문의는 “의사가 잘못해서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당연히 보상하거나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의료사고가 아닌데도 환자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이 많다”면서 “의료분재조정위원회가 있지만 큰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고, 의료분쟁 사건에 엮이게 되면 위축돼 병원을 떠난다”고 토로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은 미국의 ‘EMTALA’(Emergency Medical Treatment and Labor Act, 연방 응급진료 및 분만법) 같은 응급의료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EMTALA는 환자에 대한 주의 의무를 진료과별·사례별로 상세히 정리한 지침으로, 준수 여부에 따라 판결이 갈린다. 이 회장은 한국형 EMTALA의 필요성을 정부에 건의하고 있지만, 방향성에 동의할 뿐 마련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미국 응급의학회가 EMTALA를 구체화하기까지 15년 정도 걸렸다. 보건복지부에 15년 가까이 한국형 EMTALA가 필요하다고 얘기해 왔지만 매번 좋다고만 할 뿐 만들지 못하고 있다”라며 “선한 의도를 갖고 시작한 의료 행위가 단순히 결과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형사 처벌로 이어지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필수의료 의사가 의료사고를 내도 의료진의 잘못이 ‘단순 과실’로 인정되면 기소를 자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그간 의료사고 처벌 여부를 환자의 상태 등 결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앞으로는 의사의 과실 여부 등 의료사고의 원인에 초점을 맞춰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또 중상해 사건이라도 환자와 의료진 간 합의가 이뤄지면 기소하지 않도록 하는 ‘반의사 불벌’을 폭넓게 인정할 예정이다. 유족이 합의하지 않더라도 진료의 긴급한 정도와 사고 이후 의료진의 구명 노력 등을 감안해 형을 감경·면제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수사와 기소 여부를 가르는 의료사고심의위원회도 신설한다. 의사, 법조인, 환자단체 등으로 구성하는 심의위는 150일간 해당 의료 행위가 필수의료에 해당하는지, 의사 과실이 얼마나 중한지 등을 판단한다. 필수의료 진료에서 단순 과실로 인해 사고가 났다고 결론 나면 수사기관은 기소를 자제하고 수사를 종결하도록 할 방침이다. 이 방안에 대해 환자단체의 반발이 적지 않지만 정부는 의료개혁특별위원회 논의를 거쳐 실행안을 조만간 확정할 방침이다. 강준 복지부 의료개혁총괄과장은 “의료진과 환자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의료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며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을 통해 국회 논의 및 입법 지원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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