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세월 숙녀팀 주장을 맡았던 한국 여자 바둑 랭킹 1위 최정 9단은 지지옥션배 ‘마지막’을 담당하는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영화 ‘승부’ 실제 주인공 이창호 9단이 깜짝 선발 등판해 7연승을 몰아치자 ‘소방수’ 역할을 하기 위해 숙녀팀 여덟 번째 주자로 긴급 출격했다.
최정 9단은 이창호 9단의 8연승을 저지한 데 이어, 서봉수·이상훈·안조영·한종진·서중휘를 연파하면서 6연승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6연승을 결정한 당일 생방송 인터뷰에서 “조한승 사범님과 두고 싶다”고 설레발을 친 게 결국 화근이 됐다. 승부 세계, 특히 바둑계에서는 ‘설레발 필패’라는 법칙 아닌 법칙이 있는데 이번에도 입증된 셈이다.
제19기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 14국이 28일 오후 7시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조한승 9단과 최정 9단 대결로 펼쳐졌다. 두 기사는 지지옥션배에서 올해로 4년 연속 만나고 있는데, 이번에는 ‘최종국’이 아니라는 점이 달랐다.
대국은 일방적이었다. 중앙 전투에서 실점하면서 불리해진 최정 9단은 바둑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조한승 9단 특유의 초일류 대세관과 유려한 국면 운영에 밀린 최 9단에게 그동안 6연승을 하면서 맹위를 떨친 위용은 이날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 조한승 9단은 ‘최정 천적’임을 입증하며 완벽한 내용으로 신사팀에 승전보를 전했다.
이 대회에서 두 기사는 지난 2022년 처음 만났다. 당시 제16기 지지옥션배 본선 23국(최종국)에서 조한승 9단이 최정 9단에게 238수 끝 흑 반집승을 거두면서 신사팀에 오랜만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2023년 제17기 지지옥션배에서도 최종국인 23국에서 두 기사가 격돌했고, 역시 조 9단이 226수 끝 백불계승을 거두면서 2년 연속 신사팀 우승을 확정했다. 지난해 8월26일, 제18기 대회에서도 두 기사는 최종 23국에서 격돌했다. 결과는 조한승 9단의 238수 끝 백불계승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연속으로 최종국에서 만나 모두 패배한 상대를 기세 좋게 호출한 대가는 혹독했다. 6연승을 달리던 최정 9단은 여세를 몰아 조한승 9단에게 당한 3연패를 끊어내고 싶은 마음을 품었지만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초 3년 연속 자신의 손으로 우승을 결정한 신사팀 ‘끝판왕’ 조한승 9단은 이 타이밍에 출전할 계획이 없었다. 신사팀은 이정우 9단, 최명훈 9단 순서로 오더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최정 9단이 생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조한승 9단을 호명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신사팀 ‘주장’을 맡아 출전 순번을 짜고 오더를 제출하고 있는 조 9단은 “제가 뒷 순번에 출전할 계획이었는데, 신사팀 선수들이 생방송에서 최정 9단이 말하는 걸 들었다면서 먼저 나가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면서 “나오라고 했고(최정 9단), 나가라고 해서(신사팀 선수들) 나왔다”고 말했다.
지난 3년 동안 주장을 맡았던 ‘여자 랭킹 1위’ 최정 카드를 일찌감치 소진한 숙녀팀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29일 오후 7시 같은 장소에서 속행하는 15국에는 최근 여자 랭킹 5위로 하락한 김채영 9단이 출전한다. 조한승 9단과 김채영 9단은 두 번 만나 조 9단이 모두 승리한 바 있다.
40세 이상 연령 제한과 랭킹 30위 미만 등 각종 제약을 두고 구성한 신사팀과 선수 구성에 어떠한 제한도 없는 숙녀팀이 12대 12로 연승전을 벌이는 지지옥션배는 우승팀이 상금 1억2000만원을 독식한다. 지난 18번 대결에서 신사팀과 숙녀팀은 각각 9차례씩 우승을 나눠 가졌다. 신사팀은 2·3·5·7·10·13·16·17·18기를, 숙녀팀은 1·4·6·8·9·11·12·14·15기를 우승했다.
제19기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의 총규모는 2억4500만원이며, 우승 상금 외에 별도로 3연승 시 200만원의 연승상금이 지급된다. 이후 1승당 100만원의 연승상금이 추가로 지급되며, 제한시간은 시간누적(피셔) 방식으로 각자 20분에 추가시간 30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