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돌갈이 얘기’ 사태는 없어야 한다 [흑백 세상]

제2의 ‘돌갈이 얘기’ 사태는 없어야 한다 [흑백 세상]

이세돌-알파고 당시 바둑에 무지한 기자들 ‘돌갈이 얘기’ 오보
2국과 4국 동일한 포석 사용한 알파고에 ‘흉내바둑’ 해프닝도
명백한 마이너 기전 쏘팔코사놀배, 억지 주장은 신진서 9단 모욕

기사승인 2025-09-19 14:31:09 업데이트 2025-09-19 23:14:41
‘바둑 황제’ 신진서 9단(오른쪽)이 지난 12일 마이너 세계 타이틀 쏘팔코사놀배에서 중국 투샤오위 9단을 2-1로 제압하고 우승했다. 왼쪽은 쏘팔코사놀배를 후원한 심범섭 인포벨 회장. 쿠키뉴스 자료사진

9년 6개월 전이었다. 이세돌과 알파고가 ‘세기의 대결’을 펼쳤을 때, 바둑계는 전성기였던 1980~90년대 이후 근 30년 만에 역대급 관심을 받았다. 영화 ‘승부’의 무대가 됐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중반, 바둑은 국내를 비롯해 동양 삼국(한·중·일)을 중심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2016년 이세돌-알파고 챌린지매치 당시, 바둑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우선 기사가 쏟아진 양부터 차이가 컸다. 언론사가 많지 않았던 30년 전과 2016년 미디어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양적으로는 크게 증가했지만 질적으로는 하락한 모습도 보였다. ‘돌갈이 얘기’와 ‘흉내바둑’이 대표적인 키워드다.

바둑에선 먼저 착점하는 흑과 뒤에 착점하는 대신 ‘덤’을 받는 백을 가리기 위한 ‘돌가리기’를 한다. 돌가리기는 바둑 용어인데, 이세돌 9단이 4국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5국은 돌가리기 하지 않고 흑으로 두고 싶다”고 말한 이후 사달이 났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이세돌 9단의 돌가리기 발언을 ‘돌갈이 얘기’라고 타전한 탓이다. 명백한 오보다.

바둑의 전략 중 ‘흉내바둑’이 있다. 일본의 후지사와 호사이 9단이 흉내바둑 최고수로 손꼽힌다. 주로 백으로 대국할 때 상대가 두는 수를 대칭 형태로 따라두는 기술이다. 그런데 알파고가 흉내바둑을 뒀다는 기사도 쏟아졌다. 이세돌과 대국에서 2국 당시 썼던 포석을 4국에도 똑같이 사용했다는 내용인데, 이는 흉내바둑과는 거리가 멀다. 이 역시 바둑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보다.

제2의 ‘돌갈이 얘기’ 사태가 또 벌어지고 있다. ‘바둑 황제’ 신진서 9단은 지난 12일 마이너 세계 타이틀 쏘팔코사놀배에서 중국 투샤오위 9단을 2-1로 제압하고 우승했다. 1국을 내줬지만 2-3국에서 완벽한 내용으로 승리하면서 세계 바둑 랭킹 1위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창호 9단(17회), 이세돌 9단(14회), 조훈현 9단(9회)에 이어 메이저 타이틀 획득 순위 공동 4위에 빛나는 신진서 9단(8회)은 쏘팔코사놀배 우승으로 ‘메이저 9관’ 도전에도 좋은 기운을 얻었다.

쏘팔코사놀배를 후원한 바둑계 든든한 후원자 심범섭 인포벨 회장이 시상식에서 덕담을 하는 모습. 쿠키뉴스 자료사진

아직 메이저 9관을 달성하기 전인데, 신 9단이 12일 쏘팔코사놀배 정상에 오른 직후 ‘메이저 9회 우승’을 했다는 오보가 쏟아졌다. 쏘팔코사놀배가 한국기원이 정한 메이저 대회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언론 매체들에서 통신사 기사를 받아쓰면서 발생한 사태다.

익명의 바둑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약 7~8년 전, 바둑 국가대표 상비군 코치진과 한국기원 담당자가 회의를 통해 메이저 세계대회 기준을 ‘본선 16명 출전’과 ‘상금 1억5000만원 이상’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쿠키뉴스 역시 한국기원에 메이저 세계대회 기준을 질의했을 때 같은 답변을 받았다. 이는 메이저 세계대회 중 가장 소규모인 ‘춘란배’ 기준에 부합한다. 이에 따르면, 본선 출전자가 9명인 쏘팔코사놀배는 메이저 대회로 분류할 수 없다.

쿠키뉴스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쏘팔코사놀배를 후원한 심범섭 인포벨 회장은 사전에 이 대회가 ‘마이너’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심 회장은 시상식 후 논란을 알게 됐고, 관련자를 불러 문책했다는 후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기원 고위급 인사는 “쏘팔코사놀배를 ‘세계대회’로 개최하는 것에 대해서만 협의했지 메이저냐 마이너냐에 대해 논의하거나 관련 내용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메이저 세계대회 기준에 대해 알고 있는 한국기원 직원이 쏘팔코사놀 측과 협의했다면, 사전에 메이저 규정에 맞는 대회로 개최하도록 논의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이미 예견된 논란인데, 사전에 여러 사람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한국기원 담당자가 이를 가벼이 여긴 점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쏘팔코사놀배가 이번에 보여준 참신한 시도(9인 풀리그)는 이 대회가 메이저 세계대회가 아니라고 해서 폄훼돼선 안 된다. 바둑계 든든한 후원자로서 여러 대회를 개최하고 지원하는 심범섭 인포벨 회장의 노력 또한 평가절하될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한국기원의 고질적인 행정 난맥상은 풀어야 할 숙제다. 차기 대회부터라도 조건을 갖춰 쏘팔코사놀배가 당당한 메이저 세계대회로 인정받아야 한다.

한편 신진서 9단은 오는 10월 란커배, 11월 삼성화재배에서 메이저 9관 도전에 나선다. 메이저 세계대회인 란커배와 삼성화재배, 둘 중 어느 대회에서 우승하더라도 신 9단은 메이저 9관이 된다. 중국이 자랑하는 구리 9단과 커제 9단 역시 현재 메이저 세계대회 8회 우승으로 신 9단과 같은 공동 4위다. 신 9단이 올해 이들을 넘고 이창호-이세돌-조훈현에 이은 명실상부한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 횟수 공동 3위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