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인내의 결정체: 세잔의 사과 정물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사과를 단순한 과일이 아닌, 예술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만 그의 사과 정물화가 여섯 점이나 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이 소재에 집착했는지 보여준다. 오랜 시간 관찰하고 그릴 수 있는 과일이 사과였으나, 사과가 썩자 밀납으로 바꿨다.
한 방문객이 세잔이 정물화 그리는 방식을 묘사해 놓았는데, “세잔은 과일의 색조가 대조되고 보색을 이루도록 초록색 과일은 푸른색 옆에 배치하고 자신이 원하는 모양이 나올 때까지 이리저리 돌리거나 균형을 맞추는 일을 되풀이 하였다. 나는 그런 일이 세잔을 즐겁게 하는 향연이 아닐까 싶었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시간과 인내의 결정체였다.
단순한 과일, 복잡한 사유: 세잔의 정물화 실험
그의 대표적인 정물화 중 하나로 생트 빅투아르 산의 형태를 닮은 냅킨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그려졌다. 배경에 보이는 병풍은 세잔이 젊은 시절 직접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예술 세계가 얼마나 개인적인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보여준다.
<사과 접시>에서는 고전적 원근법을 무시하고, 각 물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배치된다. 세잔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통적인 소실점이 아니라, 물체들 사이의 관계였다. 그 안에서 사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닌, 예술적 사유의 중심이 된다.
사과 너머의 세계: 세잔의 시선과 공간
1877년경, 세잔은 파리 웨스트 거리 67번지에 아파트를 빌려 지내면서 여섯 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의 그림들에는 독특한 벽지 패턴이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세잔의 시각적 리듬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흰색 천의 주름과 나무 상자 앞면의 꽃무늬 장식은 이 벽지의 패턴을 반영하며, 일상적인 오브제들이 어떻게 예술적 질서 속에 배치되는지를 보여준다.
색채와 관계의 미학: 세잔의 정물화 실험
색채에 대한 세잔의 집착은 사과의 묘사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가장 밝은 사과는 노란색을 중심으로 주황색, 빨간색, 초록색이 은은하게 섞여 있다. 이는 빛이 사과 표면에 닿을 때의 반사와 투과를 섬세하게 표현한 결과다. 반면 다른 사과들은 빨간색을 중심으로 주황색과 초록색이 가미되어, 보다 강렬하고 생동감 있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가장 어두운 사과는 어떨까? 세잔은 이 사과를 묘사할 때 어두운 갈색과 짙은 빨강, 때로는 검은색에 가까운 색조를 사용했다. 이는 단순히 명암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면 전체의 균형을 잡고 시선의 흐름을 조율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어두운 사과는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며, 정물화 속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어떻게: 세잔의 회화적 진화
1870년대 중반, 세잔은 두껍게 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미묘한 색조 변화와 ’구성적 붓터치’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 변화가 아니라, 형태와 색채의 본질을 탐구하는 진화였다. <항아리, 컵, 사과가 있는 정물>은 초기의 강렬한 명암 대비를 거부하고 겹겹이 쌓인 색채의 조화로 깊이를 표현한다. 인상주의의 빛이 감돌지만, 세잔 특유의 절제된 색조와 수정된 팔레트가 보인다.
세잔의 정물화는 사과 하나에도 수많은 색의 층위를 담아내며,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 회화의 본질을 탐구한 흔적이다. 그의 그림을 바라볼 때, 단지 무엇을 그렸는가 보다 어떻게 그렸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네가 사랑한 세잔의 테이블
세잔은 정물화를 그리면서 꽃다발이나 꽃병의 꽃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세잔은 오랜 시간 관찰했기 때문에 화분에 담긴 식물만을 선택했다. 그 식물들은 정물화 세 점, 자 드 부팡(Jas de Bouffan)의 온실 풍경 두 점, 그리고 20년에 걸쳐 그린 약 12 점의 수채화 속에만 등장한다. 자 드 부팡은 1859년 엑스 은행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구입하여 일가족이 살던 집이다.
그의 정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테이블이 하나 있다. 조개 껍데기 모양의 손잡이에 독특하게 굽은 다리를 가진 테이블은 세잔이 아껴둔 가구였다. 그는 1890년대 최고의 정물화 세 점을 위해 이 테이블을 사용했고, 그중 하나는 클로드 모네의 소유가 되었다.
트롱프뢰유와 원근법: 르네상스 회화의 착시 마법
르네상스 화가들은 삼차원의 사물을 이차원의 캔버스에 재현하며, 일점 소실점을 정한 뒤 원근법을 사용하여 수학적인 비례로 그리는 새로운 화법을 창안하였다. 사실 이는 트롱프뢰유(Trompe-l’oeil)의 전통을 계승한 표현 방법이었다. 트롱프뢰유는 실제 사물처럼 보이도록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눈속임이다.
주로 회화나 벽화에서 색채, 음영, 원근법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정교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일점 소실점의 대표작은 <최후의 만찬>이다. 레오나르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왼쪽 귀를 소실점으로 삼았다. 그 지점에 못을 박고 줄을 매달아, 천장과 벽의 테피스트리로 수학적 원근법을 완성하여 깊이 있는 공간을 창출하였다.
평면 위의 본질: 세잔이 색채로 구축한 공간
세잔은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주의의 그림이 박물관에 있는 그림처럼 견고하게 만들기”를 원했다. 세잔은 기하학적 원근법을 거부하여 평면성을 강조하고, 색채 원근법으로 질감을 제한하여 형태 자체에 집중하고 사물의 본질에 닿으려 하였다.
1890년경에 그려진 <사과와 앵초 화분이 있는 정물화>는 세잔의 양식이 원숙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테이블 왼쪽과 오른쪽의 높이와 색이 다르다. 왼쪽은 위에서 본 모습이고 오른쪽은 옆에서 본 모습을 그리며 충돌되는 부분을 감추기 위해 식탁보로 덮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빛이나 그림자 없이 오직 색채만으로 형태를 구축하고, 의도적으로 왜곡된 원근법을 통해 독창적인 공간을 창출했다. 과일, 식탁보, 화분 등 모든 대상은 미세한 색 변화로 표현되며, 화면 전체에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낸다.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다
세잔은 “사과 한 알로 파리를 놀라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엑스 근처에서 재배된 프로방스 사과와 베르 디엘 배를 선택해, 정면과 측면, 위에서 바라본 다양한 시점으로 과일을 관찰했고 한 화면에 그렸다. 테이블과 접시는 위에서 본 모습, 왼쪽의 배는 옆에서 본 모습이기에 어딘지 불안하고 위태롭다. 테이블 상판과 다리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사람의 시각은 한 시점으로만 사물을 보지 않고 여러 시점으로 본 장면을 결합하여 구성한다는 사실을 그림으로 구현해 보여준 화가가 바로 세잔이었다. 그의 정물화는 단순한 과일을 조각처럼 만들어 색채와 공간의 혁신을 보여준다. 사과는 더 이상 과일이 아니라,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도구가 되었다.
세잔의 테이블, 피카소의 시작
세잔은 미술 이론의 전복을 위해 익숙한 사물들을 선택해 정물화를 그렸다. 큐비즘(Cubism) 초기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는 레스타크에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공동작업을 하였다. 분석적 입체주의 정물화에는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람, 와인 병, 술잔, 바이올린, 기타 그리고 테이블 등을 소재로 사용했다.
이는 세잔의 이론을 적용하며,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한 화면에 통합한 것을 관람자들이 알아차리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눈은 정면이, 코와 발은 옆모습이 특징적이다. 그래서 눈은 정면으로, 코나 발은 옆모습으로 그린 것이 큐비즘이다.
생강병과 테이블보: 세잔의 공간 실험
라피아 끈으로 묶인 생강병은 12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1890년대 초의 활력을 간직한 세 점과 닮아 있다. 술병과 가지, 레몬과 수박은 옆모습으로, 생강병과 초록색 도자기는 위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무늬가 있는 테이블보는 정면에서, 접시에 깔린 테이블보는 옆모습으로 과일이 접시 채 쏟아져 내릴 듯이 불안정하다.
그래서 세잔은 테이블보를 깔았고, 피카소는 테이블보를 걷어냈다. 세잔은 그렇게 피카소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 그림에서는 술병의 배치가 공간을 압도하며, 색채로 큼직하게 나뉜 단순한 구도 속에서 하나의 덩어리처럼 화면에 녹아든다. 형태, 패턴, 색채, 질감이 겹겹이 쌓이며, 세잔 특유의 시각적 깊이를 만들어낸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세잔의 정물 철학
세잔에게 정물은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 사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히 지속되는 본질에 대한 탐구였다. 사과 너머에 있는 세잔의 시선은, 결국 우리에게 ‘보는 법’을 다시 묻는다. 사물을 바라보는 것뿐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잔은 사과 한 알로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도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걸작을 선물했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