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드레스덴 전철 밟나’…종묘 앞 개발에 ‘세계유산 취소’ 경고등

‘리버풀·드레스덴 전철 밟나’…종묘 앞 개발에 ‘세계유산 취소’ 경고등

대법 “서울시 조례 적법”…20년 멈춘 세운4구역 재개발 재시동
유산청 “종묘 세계유산 등재 철회 우려”…英·獨도 개발 강행 끝 취소

기사승인 2025-11-08 06:00:09
서울 종로구의 재개발 사업지 세운4구역.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宗廟)로부터 약 180m 떨어져 있다.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20년 넘게 멈춰 있던 종묘(宗廟) 앞 재개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법원이 서울시의 손을 들어주면서 세운4구역에 고층 빌딩이 들어설 길이 열렸다. 그러나 국가유산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며 “리버풀·드레스덴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서울시 손 들어준 대법원…20여년 멈췄던 개발 재시동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신숙희)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시의회를 상대로 낸 ‘서울시 문화재 보호 조례’ 일부개정안 의결 무효 확인 소송에서 6일 원고 패소 판결했다. 사실상 종묘와 맞닿은 세운4구역 재개발을 추진해 온 서울시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대법원은 “문화유산법 및 시행령 관련 규정의 문언과 취지에 비춰 상위 법령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하 역보지역)’을 초과하는 지역에서의 지정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사항까지 국가유산청장과 협의해 조례로 정하도록 위임했다고 해석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어 “서울시의회가 조례안을 의결하면서 당시 문화재청장(국가유산청장)과 협의하지 않았더라도 법령우위원칙(법령이 조례보다 위에 있다는 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결론을 내렸다.

소송의 쟁점인 조례 19조 5항은 지난 2023년 서울시의회에 의해 삭제됐다. 조항에는 ‘역보지역 범위(국가지정유산 100m 이내)를 초과하더라도 건설공사가 문화재에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면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검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조항이 상위법인 문화재보호법보다 포괄적인 과도한 규제라는 게 당시 결정의 배경이었다.

대법원의 판결에 서울시는 즉각 환영 입장을 내놨다. 시는 “20여년간 정체돼 온 세운4구역 재정비 사업의 차질 없는 추진에 힘을 얻게 됐다”며 “수용 가능한 범위에서 국가유산청과 협의해 내년 착공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앞서 시는 지난달 30일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결정(변경) 및 지형도면’을 고시했다. 이에 건물 최고 높이는 종로변 55m, 청계천변 71.9m에서 각각 종로변 98.7m, 청계천변 141.9m로 상향됐다. 종묘 앞 고층 빌딩숲 탄생이 가능해진 것이다.

유산청 “세계유산 철회 가능성”…독일·영국, 개발 강행 후 등재 취소 전례

문체부와 국가유산청은 “모든 수단을 강구해 종묘를 지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6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시가 개발을 강행하면 등재가) 취소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다음날인 7일에는 최휘영 문체부 장관과 서울 종로구 종묘를 찾아 “대체 불가한 가치를 지닌 종묘가 지금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며 “종묘 앞에 세워질 건물은 서울 안에 있는 조선 왕실 유산이 수백 년간 유지해 온 역사문화경관과 종합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우려의 배경에는 독일과 영국의 전례가 있다. 독일 드레스덴 엘베 계곡은 2009년, 영국 리버풀 해양무역도시는 2021년 각각 세계유산 지위를 잃었다. 교통난 해소를 위한 계곡 다리 건설과 항만지구 내 대형 경기장·상업지구 조성이 원인이었다. 두 곳 모두 필요에 의해 공사를 추진했지만, 유네스코는 개발에 따른 가치 손상을 이유로 세계유산 자격을 박탈시켰다.

통상 유네스코는 세계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훼손이 확인되면 ‘위험에 처한 유산’으로 먼저 등록하고, 개선되지 않으면 등재를 철회한다. 이때 OUV 훼손은 유산 자체의 파괴뿐만 아니라, 유산을 둘러싼 경관이나 조망 축(view corridor)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경우도 포함한다. 독일과 영국은 각각 4년, 9년 동안 위험 유산으로 분류된 후 개발을 강행하다 끝내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됐다.

서울시 “과도한 우려…종묘 가치 더욱 높일 것”

시는 세운4구역이 역보지역 밖인 데다 종묘에서 약 180m 떨어져 있어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개발로 인해 세계유산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주장 또한 “과도한 우려”라고 밝혔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7일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옥상정원에서 브리핑을 열고 “서울시의 세운지역 재개발 사업이 종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주장은 과도한 우려”라며 “오히려 종묘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남산부터 종로까지 이어지는 녹지축 조성을 통해 종묘로 향하는 생태적 접근성을 높임으로써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를 더욱 높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체부 장관 등과의 소통 가능성을 시사했다. 오 시장은 “다음주 초라도 서울시의 계획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양립하는 가치를 함께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의 자리를 가지겠다”며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면서 도심 개발도 이어갈 방법을 찾아나가는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노유지 기자
youjiroh@kukinews.com
노유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