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의 귀향: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의 변주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1890년부터 1896년까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다섯 점을 그렸다.
그림 값이 화가의 가치를 자리매김 해주진 않지만, 특별해 보이지 않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카타르 왕실이 2011년 4월 경매에서 2억 7천4백만 달러(약 3,000억 원)에 낙찰 받았다. 그래서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었다.
1890년대, 쉰을 넘긴 세잔은 오랜 타향살이를 접고 고향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인정받지 못한 세월이 그에게는 상처였지만, 그는 아버지의 영지에서 다시 붓을 들었다. 고된 노동을 마친 농장 일꾼들이 카드 놀이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장면은 세잔에겐 평범한 일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과 관계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담아낼 수 있는 무대였다.
파이프처럼 견고한 인간들: 세잔의 시리즈 분석
그는 이 장면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기억에 남는 형태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카라바조의 <카드놀이 사기꾼>(1594~95)의 “소설 같은 그림”과 샤르뎅의 일상적 정서를 떠올리며, 세잔은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를 구축해 나갔다. 카드 게임을 하는 인물들의 자세와 위치는 수없이 조정되었고, 결국 네 명의 인물은 마치 벽에 걸린 파이프처럼 견고하게 어우러졌다.
이 작품에서 얻은 은은한 권위는 이후 더욱 확장되었다. 세잔은 이 시리즈를 통해 단순한 카드 놀이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회화적 여정을 완성했다.
파이프와 침묵: 세잔의 가장 큰 카드놀이
세잔의 카드놀이 연작 중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단순한 풍속화의 범주를 넘어선다. 세 명의 남자가 작은 탁자에 마주 앉아 카드놀이에 몰두하고 있고, 왼쪽에 서 있는 남자는 빨간 스카프를 메고 파이프를 물고 있다. 흥미롭게도, 벽에는 피우지 않은 파이프 네 개가 나란히 걸려 있어, 이 장면에 묘한 긴장과 질서를 부여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버전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정면에 앉은 남자의 모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카드놀이를 지켜보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아내로 추정되며, 이 장면에 새로운 시선과 관계의 층위를 더한다.
존재의 깊이를 그리다
세잔은 이 소박한 인물들에게 위풍당당한 존재감을 부여했다. 인물들은 주위의 소음이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카드에 집중한다. 그들의 자세와 표정은 침묵 속의 몰입을 보여주며, 세잔은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이를 탐구한다.
그는 인물의 수를 늘리고, 캔버스의 크기를 두 배 이상 확장하며, 이 장면을 하나의 기념비적인 구성으로 끌어올렸다.
침묵 속의 묵상: “세잔적 인물”
세잔의 연작 중 하나인 이 예비 연구 작품은, 앞에 나온 두 개의 가장 큰 버전(메리온 반스 재단,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연결되며, 특히 왼쪽 옆모습을 보여주는 카드놀이 하는 인물의 자세를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어깨가 축 늘어진 인물은, 세잔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세잔적 인물'의 전형이다. 그는 말없이,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카드에 집중하고 있다. 인물은 단순한 묘사 이상의 존재감을 지니며, 주변 인물들과 안정적인 구성으로 하나의 덩어리로 통합된다. 세잔의 초상화에서 자주 드러나는 기념비적인 효과가 인물에게도 스며든다.
이 작품은 세잔의 '묵상'적 접근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그는 인물 하나하나를 독립적으로 탐구하며, 드로잉과 수채화를 통해 천천히 구성을 전개했다. 유화로 그려진 이 예비 연구는 그러한 탐색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세잔은 자신의 기질에 따라 인물을 제거하고, 캔버스 크기를 줄이며, 장르 장면의 이야기 요소들을 지워 나갔다. 그 결과, 작품은 더욱 밀도 있고 풍성해졌지만 동시에 덜 정교한 후기의 흔적을 품게 되었다.
세잔의 카드놀이 연작에 관한 단서
세잔의 카드놀이 연작은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 제작 순서에 대한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는 가운데, 이 예비 연구는 그가 어떻게 주제에 접근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감식안의 시대: 세잔, 볼라르 그리고 카사트
1895년, 파리의 한 갤러리에서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화상 앙브루와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7~1939)는 세잔의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 전시는 일부 회의적인 반응 속에서도 세잔의 명성을 급속히 끌어올렸다. 그가 그린 견고한 형태와 침묵 속의 인물들은, 당시 미술계의 흐름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전시를 통해 세잔은 저명한 미술사학자 버나드 베런슨(Bernard Berenson, 1865~1959), 미국 인상파 화가 메리 카사트(Mary Cassatt, 1844~1926), 그리고 수집가 헨리 오스번 하베마이어 부부에게 소개되었다. 그들은 세잔의 작품을 이해하고, 수집하고, 연구하며 그의 예술 세계를 넓혀 준 감식안들이었다.
특히 메리 카사트는 미국의 컬렉터들에게 인상파 동료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파리에서 활동하며, 미국 미술계에 새로운 시선을 불어넣었다. 마치 간송이 오세창이라는 감식안을 통해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했던 것처럼, 카사트는 세잔과 인상파를 미국에 소개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세잔의 예술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식안을 가진 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깊이와 구조를 지닌 세계였다.
33 번 대서양을 건너다: 하나의 유산
카사트의 친구였던 루이진(Louisine)은 하베마이어와 결혼하였고 예술을 사랑했다. 루이신은 카사트의 조언에 따라 인상파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대서양을 33번을 건넜다. 남편 헨리, 아들과 수집한 1,967점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나도 메트에서 그들을 알게 되었다.
대칭과 침묵: 카드놀이에 담긴 본질
세잔의 회화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사물의 본질을 향한 집요한 탐색이다. 그의 카드놀이 연작 중 이 작품에는 그가 평생 몰두했던 대상의 단순화, 절제된 색채, 간결한 화면 구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그림은 드로잉과 수채화, 초상화 등 수많은 습작을 거쳐 완성된 유화로 세잔의 회화적 사유가 응축된 결과물이다.
그는 가운데 테이블을 기준으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을 대칭으로 배치했고, 테이블 중앙의 포도주병은 그 구도를 더욱 극대화한다. 양팔과 어깨, 숙인 고개까지도 대칭을 강화하며, 화면에 조용한 긴박감을 불어넣는다.
삼각형의 안정, 원통의 존재: 형태의 본질
세잔은 화면을 삼각형 구도로 안정시키고, 인물들의 표정에서는 승패의 긴장보다는 평온한 일상의 정서를 담았다. 어두운 옷의 왼쪽 인물과 밝은 옷의 오른쪽 인물, 흰 셔츠와 파이프, 카드의 색채 대비는 절제된 황토색 배경 속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그의 인물 묘사는 형태의 본질을 향한다. 머리는 구처럼, 팔과 다리는 원통처럼 표현되며, 세잔이 추구한 ‘사물의 구조적 진실’이 드러난다. 원근법 없는 평평한 화면은 회화의 전통적 공간 개념을 거부하며, 현대미술의 문을 여는 실험이 된다.
이 작품은 단순한 카드놀이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세잔이 구축한 조형 언어의 결정체이며, 현대미술의 기초를 다진 철학적 회화이다.
앉아 있는 농부, 색채로 새긴 존엄
이 인물은 카드놀이 연작에 등장하진 않지만, 자 드 부팡 영지에서 일했던 실제 노동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세잔은 글을 통해 농촌 노동자의 침묵과 품위를 그려냈다.
1890년, 세잔은 색채 그라데이션을 활용해 인물의 형태를 구축하고 입체감을 표현했다. 선 대신 색으로 공간을 만들며, 그는 사물의 본질을 탐구했다. 이 작품은 제3 공화국(1870~1940) 프랑스의 노동계급 시민에게 헌정하는 조용한 기념비이다.
말없이 앉아 있는 인물의 자세와 표정, 절제된 색채는 세잔이 추구한 회화적 사유를 담고 있다. 단순화된 형태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빛난다. 세잔은 평범한 사람을 통해 예술의 깊이를 증명했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