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미국 엔비디아의 최신 AI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을 확보했다. 단일 국가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번 물량이 순차 배치되면 한국의 GPU 보유량은 기존 6만여장에서 30만장 이상으로 확대된다.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의 AI 연산 인프라를 갖추게 된다. 업계는 그동안 한국 AI 경쟁력의 약점으로 지적돼 온 ‘GPU 부족’ 문제가 사실상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놓고 있다.
11일 업계와 정부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삼성전자, SK그룹, 현대차그룹, 네이버클라우드,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와 손잡고 최신 GPU ‘블랙웰(Blackwell)’ 26만장 공급에 합의했다. 전체 규모는 약 20조원에 달한다.
배분 물량은 네이버클라우드 6만장,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 각각 5만장, 정부가 5만장이다. 기업들은 확보한 GPU를 각자 핵심 사업에 맞춘 ‘AI 팩토리’ 구축에 활용한다.
삼성 “자율 팹 구현”…반도체 AI 공장 본격화
삼성전자는 GPU 5만장을 반도체 AI 공장에 투입한다. 삼성은 엔비디아의 계산 리소그래피(cuLitho) 기술을 자사 광학 근접 보정(OPC) 플랫폼에 적용해 기존 대비 포토마스크 제작 속도를 최대 20배 끌어올렸다.
반도체 제조에서 가장 많은 연산이 필요한 포토마스크 제작 공정은 CPU 기반에서 3000만시간이 걸렸지만, GPU 350대로는 며칠이면 끝난다.
또한,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옴니버스’ 플랫폼을 적용해 공장 전 과정을 디지털 트윈(가상 복제본)해 공장 스스로 최적화하는 ‘자율 팹(Fab)’ 구현을 추진 중이다.
삼성 관계자는 “2nm 이하 첨단 공정 개발 속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며 “TSMC·마이크론과의 경쟁에서도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SK그룹, ‘구독형 GPU’ 추진…현대차, ‘모빌리티 AI 공장’
SK그룹은 확보한 GPU로 산업용 ‘AI 팩토리(데이터센터)’를 세운다. 반도체·조선·전력·물류 기업에 GPU 연산 자원과 AI 솔루션을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며, GPU를 직접 구매하기 어려운 기업을 대상으로 ‘구독형 GPU’ 사업도 추진한다.
현대차그룹은 ‘모빌리티 AI 공장’을 만든다. 핵심은 실제 도로를 주행하지 않아도 가능한 ‘피지컬 AI(물리적 AI)’ 훈련이다. GPU 클러스터에서 비 오는 도심, 강남역 교차로 등 수백만 건의 자율주행 상황을 학습시키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현대차는 현재 레벨2 수준인 자율주행 기술을 레벨2+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또한 현대차는 생산라인을 디지털 트윈으로 구성해 AI가 로봇·물류동선을 자율 제어하도록 한다. 가상환경에서 작업을 연습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실제 생산라인에 투입된다.
네이버클라우드, ‘한국형 LLM 팩토리’…스타트업 지원도
네이버클라우드는 ‘한국형 LLM 훈련 인프라’를 구축한다. 6만장의 GPU를 기반으로 하이퍼클로바X 훈련 속도를 높이고, 이미지·영상·음성을 다루는 멀티모달 AI 개발에 나선다. 데이터 수집부터 배포까지 전 과정을 자동화해 스타트업도 초거대 AI 모델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정부, 5만개로 'AI 민주화'…스타트업 지원 강화
정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도로 GPU 5만장을 ‘국가 AI 컴퓨팅센터’에 투입한다. 올해 초기 가동을 시작해 2027년 전면 운영을 목표로 한다. 센터는 대학·연구기관·스타트업에 GPU를 개방해 누구나 초거대 AI 모델 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기존 대기업 중심의 제한된 GPU 접근성을 해소하고, 연산 자원을 ‘공공재’처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2025년에서 2030년까지 약 4조원을 투입해 센터를 완성할 계획이다.
AI를 국가 전략기술로 지정해 세제 혜택을 강화하고, 지역 AI 스타트업 허브 조성과 인재 양성도 추진한다. 배경훈 과기정통부 장관은 “한국은 AI와 로보틱스에서 압도적인 기회를 갖고 있다”며 “AI 3대 강국 도약을 위한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전력·인재는 ‘병목’…“GPU는 확보, 생태계 구축이 관건”
글로벌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26만개의 GPU를 모두 가동하려면 원자력발전소 1기에 해당하는 약 1기가와트(GW) 수준의 전력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력 수급이 불안정한 여름·겨울에는 전력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 정부가 데이터센터 건설 규제를 완화하고, 전남 해남에 민관 합작형 AI 데이터센터를 추진하고 있지만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확보는 여전히 더디다.
인재 부족 문제도 심각하다. 미국은 매년 수천명의 AI·반도체 연구 인력을 배출하지만, 한국은 연간 수백 명 수준에 그친다. 업계에서는 “최상위 인재들이 의대로 몰리면서 AI 분야로 유입되지 않고, 어렵게 확보한 인재들도 미국 빅테크로 빠져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토로한다.
글로벌 경쟁도 거세다. 메타는 GPU 60만 장 이상을 확보했고,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도 수십만 장 규모의 인프라를 운영하고 있다. 이번 확보 규모가 의미는 있지만, “정상급 경쟁력 확보보다는 아직 따라잡기 단계”라는 평가도 나온다.
손재권 더밀크 대표는 “GPU 확보는 시작일 뿐, AI 생태계 구축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특히 최첨단 GPU를 구동하고 서비스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인재 양성이 시급하다. 인재 양성은 10년 프로젝트로 지금 시작해도 2035년에야 성과를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AI 스타트업 관계자도 “GPU만 쌓아놓는다고 AI 강국이 되는 게 아니다”며 “데이터 규제 완화, 전력 인프라 확충, 인재 유출 방지, 스타트업 GPU 접근성 보장 등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