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신약 출시 재검토하는 글로벌 빅파마들…“중증·희귀질환자 치료 기회 박탈” [생명의 값②]

韓 신약 출시 재검토하는 글로벌 빅파마들…“중증·희귀질환자 치료 기회 박탈” [생명의 값②]

기사승인 2025-11-13 06:00:11 업데이트 2025-11-13 06:15:30
미국이 약가를 세계 최저 수준으로 낮추는 ‘최혜국 대우 가격(MFN)’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글로벌 제약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자국 내 약값을 낮추기 위한 미국의 압박이 한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의 약가 결정과 신약 도입 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약값 문제가 아닌 생존과 직결되는 것으로, 발 빠르게 대비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약가 정책의 파급력이 국내 제약·보건환경에 어떤 충격을 가져오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3편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글로벌 제약사들이 미국의 ‘최혜국 대우 가격(Most Favored Nations, MFN)’ 정책 여파로 한국에 대한 신약 출시를 미루거나 재검토하고 있다. 미국이 자국 내 약가를 세계 최저 수준에 맞추려고 하면서 한국처럼 약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가 미국 약가 결정의 기준점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국내 신약 출시가 줄어들고, 연구개발(R&D) 투자가 감소하는 ‘코리아 패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3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국내 신약 출시를 준비하는 다국적 제약사들이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한국에 지사를 둔 해외 기업들은 국내 시판 허가를 받은 신약의 건강보험 급여 약가 등재 심사를 보류하는 등 급여 신청을 미루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MFN 정책으로 미국에서 판매하는 의약품의 가격을 다른 선진국 수준으로 낮추도록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제약사들은 각국의 정책 안정성과 절차 예측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제도 변화나 불확실성이 클수록 신약 도입을 신중히 검토한다”며 “글로벌 제약사들의 구체적인 결정은 각 기업의 판단에 달려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MFN 정책이 시행되고 한국 약가가 참조될 경우 국내 신약 출시 지연 가능성은 분명 높아질 수 있다”며 예측했다.

미국은 MFN 정책을 확대하며 한국의 약가를 참조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약가는 전 세계와 비교해 저렴한 수준이다. 한국바이오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약값은 미국의 25.5% 수준이다. 미국과 비교해 한국의 의약품은 14.2%, 바이오의약품은 17.4% 수준에 형성돼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놓고 보면 평균보다 약 40% 낮은 수준이다.

국내 약가는 시장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급여가 적용된 의약품 표시가격을 전 세계에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다른 나라는 자국의 의약품 가격을 책정할 때 한국의 사례를 참조한다. 특히 중국 정부는 한국에서 먼저 급여 등재된 약가를 참조해 약가안을 마련하고, 이를 공개하지 않은 채 제약사와 협상을 벌인다. 중국 정부와 제약사 양측이 제시한 약가 차이가 15% 이상만 돼도 중국은 협상을 포기한다. 이 때문에 제약사들은 한국에서 의약품 급여 등재를 늦추더라도 시장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중국과 먼저 약가 협상에 나서려 하고, 한국은 의약품 출시 순서에서 뒤로 밀리게 된다.

서혜선 경희대 약학대학 교수는 “한국은 시장 규모가 크지 않고 약가 수준이 낮은 국가이기 때문에 글로벌 약가가 전반적으로 하향 조정되는 추세에서 제약사들이 한국 출시를 지연하거나 제외하는 전략적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수 있다”며 “이는 곧 국민의 신약 접근성 저하로 이어질 우려가 있으며 이에 대한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커지는 中 영향력…R&D 투자 악화 우려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한국은 더 이상 글로벌 제약사들에게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게 됐다. 국내 R&D 투자가 악화되고, 임상시험 참여 기회도 줄어들 수 있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제약사의 국내 R&D 투자비용은 1조369억원으로 5년간 연평균 14.8% 증가했다.

한국, OECD 신약 허가·급여율.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한국의 까다로운 신약 허가·급여 규제는 글로벌 제약사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제약사 간 복잡한 가격 협상과 급여 등재 절차는 수년씩 걸리기 일쑤다. KRPIA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신약 허가율은 33%, 급여율은 22%로 OECD 평균(허가율 41%, 급여율 29%)에 미치지 못한다. 급여 등재까지 걸리는 기간 역시 한국은 평균 46개월로 장시간 소요된다.

희귀질환 분야는 더 심각하다. 국내 환자 수가 적다는 이유로 제약사들이 시장성 부족을 들어 국내 출시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설령 도입된다 하더라도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약값은 사실상 일반 가정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웃돈다. 미국제약협회(PhRMA) 보고서를 보면 2021년 기준 최근 10년간 전 세계에서 개발·허가된 혁신의약품 408개 중 급여 적용 후 한국에 도입된 치료제는 35% 정도에 불과하다.

국내 중증·희귀질환 치료제의 80% 이상이 글로벌 제약사를 통해 공급되고 있는 만큼 글로벌 시장의 가격 압박이 심화될 경우 환자의 치료 기회가 박탈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서 교수는 “MFN 정책이 확대될 경우 제약회사의 신약 R&D에 대한 경제적 동기가 약화돼 혁신 신약 개발이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며 “약가가 인위적으로 낮게 설정될 경우 제약사는 높은 개발비를 회수하기 어려워져 희귀질환이나 암 등 위험이 큰 질환 영역에 대한 투자를 줄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국제 참조가격제에 따라 특정 국가의 낮은 약가가 다른 국가의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경우 제약사는 가격 인하 도미노 효과를 우려해 약가가 낮게 책정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에는 신약 출시를 지연하거나 포기할 수 있다”면서 “희귀·중증질환 치료제에 대한 별도의 예산 또는 기금을 마련한다면 재정 부담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고가 치료제 접근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건강보험 재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약사 사업 축소·시장 철수…“이례적 상황”

제약사 입장에서 한국 약가가 영업에 부정적 요인이 되면 기존 건강보험 등재 약까지 퇴출시킬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변영식 법무법인 세종 고문은 “현재 글로벌 제약사 해외 본사가 국내 지사에 ‘신약 허가도 받지 말라’고 강하게 압박하는 이례적 상황”이라고 전했다.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실제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 만료로 제네릭(복제약)이 출시돼 약가가 공개·인하되면서 국내 시장에서 철수한 사례가 적지 않다. 한국아스트라제네카는 당뇨병 치료제인 ‘포시가’(성분명 다파글리플로진)의 특허 만료 뒤 다수의 제네릭 출시와 함께 약가 인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국내 품목허가를 취하했다. 또 암젠코리아는 건선성 관절염 치료제 ‘오테즐라’(아프레밀라스트)의 제네릭의 먼저 보험 적용을 받아 출시되면서 용도특허를 포기하고 공급을 중단했다.

변 고문은 “미국 내 투자와 의약품 가격 인하 압박이 강하게 들어오는 상황에서 글로벌 제약사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미국 외 국가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인원과 사업을 축소하는 것”이라며 “경쟁력 있는 사업부와 치료 영역만 유지하고 나머지는 정리하면서 각종 임상과 투자가 끊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업계는 MFN 정책의 파급효과가 단순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환자의 생명과 치료 기회의 형평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공공 보건 과제’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글로벌 제약사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글로벌 시장 약가의 하락으로 인해 연구개발 투자 축소, 고용 감소, 임상 인프라 위축 등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며 “결국 MFN 정책의 파급효과는 단순한 가격 이슈를 넘어 의료 접근성과 국가 혁신 역량의 지속 가능성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대체 치료제가 거의 없는 중증·희귀질환의 경우 신약 도입이 1년만 지연돼도 환자들의 생존율이 낮아질 수 있다”며 “제도의 유연성이 보장된 국가가 신약 도입의 우선순위에 오를 가능성이 큰 만큼 한국 역시 정책의 일관성과 협력 구조를 강화해 제도적 기반을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