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경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 경쟁(1차전)에 이어 폭증하는 전력을 감당하고 펄펄 끓는 서버의 열을 식히는 ‘인프라 안정성’이라는 2차전이 새로운 병목으로 부상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엔비디아의 GPU 26만장을 확보했지만, 이를 구동할 전력과 냉각 인프라는 뒤처져 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알파벳), 메타, 아마존 등 4대 빅테크들이 올해 한 해에만 총 3700억달러(약 500조원)라는 천문학적인 자본을 AI 인프라에 쏟아붓고 있다. 단순히 GPU 확보를 넘어, 확보한 GPU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전력망’과 ‘냉각 설비’ 구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기 먹는 하마’ AI 센터…병목은 GPU에서 전력으로
AI 2차전을 촉발한 근본 원인은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AI용 GPU다. AI용 GPU가 장착된 랙(rack·서버 묶음) 1개의 소비전력은 기존 데이터센터의 10배 이상인 60~100kW에 달한다. AI 학습용 GPU 한 대가 내뿜는 열은 일반 서버의 10배 수준이다.
이에 따라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폭증하고 있다. 블룸버그NEF(BNEF) 추정에 따르면 미국 내 데이터센터 예상 전력 수요는 2024년 35기가와트(GW)에서 2035년 78GW로 두 배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전체 미국 전력 수요의 3.5%에서 8.6%로 확대된다는 의미다.
이제 ‘GPU 공급보다 전력 공급이 더 큰 병목’이라는 실리콘밸리의 경고가 현실이 됐다. 업계에서는 “GPU 확보가 끝나자, 지금은 전력 인가, 냉각 및 부지 선점이 '로또'가 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전력망 확충이 더뎌서 센터 착공이 지연되거나, 냉각 효율 한계로 비싼 GPU를 가동률 100%로 돌리지 못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부 지역은 이미 냉각 용수 확보 등의 문제로 AI 센터 신규 인허가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블랙아웃 공포”…‘에너지 기업’ 되는 빅테크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우려는 빅테크를 ‘에너지 기업’으로 변신시키고 있다. MS는 2024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의 폐쇄된 '스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을 재개발하기로 했다. 20년간 800메가와트(MW)의 탄소제로 전력을 자사 데이터센터에 공급받기 위해서다.
아마존은 한발 더 나아가 테네시주 탈렌 에너지 핵발전소에서 1.9기가와트(GW) 규모의 전력을 20년간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동시에 소형 모듈식 원전(SMR) 개발사에 5억 달러를 투자했다
구글은 카이로스파워와 20년 구매 계약을 맺고 2035년부터 소규모 원전으로 생산된 전력을 공급받기로 했다. 메타는 1~4GW의 신규 원전 용량 확보를 위한 공개 입찰에 나섰다.
국내 현실은 더 ‘심각’…데이터센터는 짓는데 전기가 없다
한국에서도 AI 데이터센터 투자 열기가 뜨겁다. SK그룹은 아마존웹서비스(AWS)와 손잡고 국내 최대 AI 전용 데이터센터를 2027년 완공을 목표로 울산에 건설 중이다. KT클라우드는 서울 가산에 액체냉각(리퀴드 쿨링) 시스템을 적용한 센터를 개소했고, 네이버는 세종시에 두 번째 초대형 데이터센터 ‘각 세종’을 가동했다. 심지어 오픈AI까지 포항·전남권에 국내 AI 인프라 구축을 협의 중이다.
문제는 이 전력을 감당할 인프라다. 글로벌 부동산 서비스 기업 세빌스코리아에 따르면, 국내 데이터센터 총 수전용량은 현재 1.9GW 수준이다. AI 특화 수요가 늘면서 2028년에는 4.8GW로 2.5배 급증할 전망이다.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KDCC)는 국내 시장 규모가 2028년 약 10조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2024년 대비 연평균 13%대의 고성장이다
“속도보다 절차”…밀양 송전탑의 그림자
그러나 SK그룹이 짓고 있는 울산 초대형 AI 데이터센터는 완공 이후에도 전력을 인수하지 못할 ‘역설적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현행법상 모든 전력은 한국전력 계통망을 거쳐야 한다. 문제는 속도다. 데이터센터 건설은 2~3년이면 충분하지만, 송전망 구축에는 5~7년이 소요된다. 2027년 센터가 완공돼도 정작 전기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다.
SK와 AWS가 울산을 택한 이유는 인근 LNG 열병합발전소에서 값싼 전력을 직접 공급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가 울산 미포산업단지를 ‘분산에너지 특구’로 지정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11월5일 정부는 울산의 분산에너지 특구 지정을 보류했다. 현행법상 직접 전력 거래가 허용되지 않아, 발전소 전력을 곧바로 끌어올 방법이 없다.
울산 프로젝트 관계자는 “초기에는 LNG 열병합 발전으로 전력을 조달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전력 계통망을 통한 안정적 공급이 필수적”이라며 “송전망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업에 지장이 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AI센터 건설이 지역 전력망과 충돌하면서 ‘제2의 밀양 사태’ 우려도 나온다. 2010년대 초 경남 밀양에서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주민 반발이 일고 정부와 충돌해 장기 갈등으로 번진 바 있다.
한 정책 전문가는 “송전선이 주민 동의 없이 추진된다면, AI센터가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며 “절차적 투명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산업 자체가 멈출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