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레전드 바둑 기사인 커제 9단은 삼성화재배가 존폐 기로에 섰던 2018년 제23회 결승전 당시,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운을 뗐다. 그는 “최근 삼성화재배 존속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했다”면서 “전통과 권위의 삼성화재배는 프로기사를 위한 최상의 대국 환경을 제공하는 최고의 세계대회”라고 치켜세웠다. 이어 “바둑 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소중한 대회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당시는 중국 주최 세계 대회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던 시기로, 삼성화재배 외에도 메이저 세계 타이틀은 많았고 심지어 상금은 중국이 주최하는 대회가 더 컸다. 때문에 중국인인 커제 9단이 한국 기자에게 인터뷰 질문에도 없던 내용을 먼저 언급하면서 삼성화재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커제 9단은 2015~2016년 삼성화재배에서 2년 연속 우승했고, 2018년(對 안국현 9단), 2020년(對 신진서 9단) 우승 트로피를 추가하면서 통산 4회 정상에 올랐다. 이는 은퇴한 이세돌 9단과 함께 삼성화재배 최다 우승 타이 기록이자 단일 메이저 세계대회 최다 우승 기록이기도 하다.
LG배의 경우 커제 9단이 지난 29회 결승전에서 변상일 9단과 이른바 ‘사석룰’ 논란을 빚었고, 이 때문에 올해 30회 LG배엔 중국 선수단이 전원 불참하는 일이 벌어졌다. 함께 30주년을 맞은 LG배가 중국이 불참한 가운데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면, 삼성화재배는 제주도에서 성대하게 개막했다.
이창호-이세돌 철권통치 시대가 끝나고 바둑계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가 도래한 이후, 삼성화재배에서 유독 중국 기사들이 강세를 보였다. “삼성화재배에 출전하면 왠지 모를 힘이 난다”고 말하는 중국 기사도 더러 있었다. 2015년 20회 대회 이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우승 기록을 살펴보면 LG배는 한국 6회, 중국이 4회 정상에 섰다. 팽팽한 기운 속에서 한국의 근소한 우세 양상이다. 하지만 삼성화재배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중국이 6회 연속 우승한 것을 비롯해 중국 8회, 한국 2회로 중국 기사의 성적이 압도적이다. 2023~2024년 2년 연속으로 결승전은 중국 기사 간 대결로 열렸고, 특히 지난해 29회 대회에선 4강을 중국이 싹쓸이하면서 조기에 우승을 확정했다.
4강전이 진행 중인 올해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2023~2024년 삼성화재배를 연속 제패한 ‘디펜딩 챔피언’ 딩하오 9단이 준결승에 선착해 3연패를 노린다. 삼성화재배에서 3년 연속 우승한 기사는 현재까지 이창호 9단(1997~1999년, 2~4회 대회)이 유일하다. 중국 랭킹 1위 딩하오 9단이 26년 만에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16강에서 한국 랭킹 1위 신진서 9단을 꺾은 중국 강호 랴오위안허 9단은 4강에서는 한국 2위 박정환마저 격침하고 결승까지 진격했다. 공교롭게도 신진서 9단을 비롯해 딩하오·랴오위안허 9단은 모두 2000년생 동갑내기다. 바둑계에서 흔히 말하는 ‘00후(2000년 이후 출생자)’ 기사들의 본격적인 강세가 시작된 느낌이다.
반면 한국은 신진서 9단을 제외하면 여전히 1980~90년대 출생 기사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준결승에서 1989년생 김지석 9단이 중국 랭킹 1위 딩하오 9단과 건곤일척 승부를 펼친다. 30주년을 맞은 삼성화재배에서 한국은 8강부터 30대 기사만 생존한 셈인데, 전원 20대 기사인 중국과의 대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이목이 집중된다.
최초로 ‘통합 예선’ 개최, 월드조 신설에 이어 본선 32강부터 결승까지 한 번에 진행하는 방식을 도입하는 등 세계 바둑 역사를 이끄는 수많은 시도를 했던 삼성화재배는 올해 ‘같은 국가 피하기 룰’을 폐지하면서 또 다시 혁신에 나섰다. 기존 세계대회는 예외 없이 매 라운드 대진 추첨 시 동일 국가 선수가 대국하는 걸 최대한 방지하는 방식(한 번의 추첨으로 결승까지 대진표가 가려지는 대만의 응씨배는 예외)으로 진행한다. 이에 따라 바둑 세계대회는 개인전임에도 국가 대항전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삼성화재배에서 이 룰을 폐지하고 전면 무작위 추첨을 도입하면서, 30주년을 맞은 올해 대회에선 초반부터 흥미로운 대진이 속출했다. 8강에서 펼쳐진 강동윤-김지석 1989년생 동갑내기 맞대결은 바둑 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세계 바둑 역사를 선도한 삼성화재배는 올해도 명품 대회에 걸맞는 최고의 결승전을 준비하고 있다. 3판 2선승제로 펼쳐지는 결승전은 오는 16일부터 18일까지 펼쳐진다. 바둑 역사를 기록해온 사관(史官)이자 바둑 팬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적 대국이 훌륭한 기보(棋譜)와 함께 명승부로 남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