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인정하는 명품대회, 레전드 커제 탄생 [삼성화재배 30년사③]

중국이 인정하는 명품대회, 레전드 커제 탄생 [삼성화재배 30년사③]

‘커제 시대’ 개막…이세돌 이어 삼성화재배 통산 4회 우승자 등극
최근 10년 동안 중국 8회 우승, 한국은 단 2회 우승에 그쳐
암흑기에 활약한 ‘삼성화재배의 사나이’ 안국현의 고군분투

기사승인 2025-11-24 07:20:27 업데이트 2025-11-24 09:43:47
신진서 9단은 2020년 제25회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커제 9단에게 0-2로 패해 준우승했다. 한국기원 제공

앞선 1부 ‘이창호 시대 개막 알린 전무후무한 3연패 [삼성화재배 30년사①]’ 기사에서 삼성화재배 초기 10년 역사를, 2부 ‘불세출의 승부사 이세돌, 4회 우승 금자탑 [삼성화재배 30년사②]’ 기사에서는 중반 20년 역사를 돌아봤다. 초기의 주인공은 1997~1999년, 제2~4회 대회에서 ‘메이저 세계대회 3연패’를 달성한 이창호 9단이었고, 중반은 통산 4회 우승 금자탑을 쌓은 이세돌 9단이 단연 돋보였다.

3편에서는 2016년 제21회 대회부터 올해 제주도에서 막을 내린 제30회 삼성화재배 결승전까지 후기 10년 역사를 다룬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은 삼성화재배에서 무려 8번 우승했고, 한국이 우승한 건 단 2번에 그쳤다. 일본은 결승 진출조차 하지 못했다.

2편 말미, 2015년 제20회 대회에서부터 시작된 ‘커제 시대’는 3편에 들어와 본격화했다. 커제는 2016년 제21회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면서 2년 연속 정상에 오른다. 이 대회에서 커제는 준결승 상대로 평소 존경한다고 밝혀왔던 이세돌 9단과 만났다.

기자는 당시 8강전을 승리하고 4강을 앞둔 커제 9단을 현장에서 인터뷰했다. 커제 9단이 기자들 앞에 앉기 전에 8강을 먼저 끝낸 이세돌 9단이 먼저 간단하게 인터뷰하고 갔다. 당시 이 9단은 늘 자신 있고 때로는 익살스러운 모습 대신 진지한 얼굴로 “커제 9단은 매우 강한 기사다. 50대 50의 승부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커제 9단이 자리에 앉자마자 기자들은 준결승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세돌 9단은 50대 50의 승부라고 했는데, 커제 9단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커제 9단은 갑자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50(중국어 발음 ‘우쓰’)이라고요? 5(중국어 발음 ‘우’)가 아니고요?”라고 반문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멍한 표정을 짓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커제는 “농담이었다. 이세돌 9단은 제가 프로가 되기 전부터 늘 존경해왔던 기사다. 좋은 승부가 될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거의 모든 언론에서 “커제, 이세돌 상대로 이길 확률 95% 도발” 등 자극적인 제목을 쏟아냈다. 커제 9단 특유의 재치있는 입담과 자신감 넘치는 인터뷰가 아직 널리 알려지기 전이기도 했고, 통역으로부터 전해들었던 ‘50이 아니라 5아니냐’는 첫 멘트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커제는 인터뷰 현장에서 ‘95’라는 단어는 말한 적이 없다. 50과 5의 중국어 발음을 놓고 농담을 던졌을 뿐이다. 기자는 최대한 현장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살린 기사를 송고하고, 이때부터 커제를 더욱 유심히 지켜봤다. 커제는 당시 4강에서 이세돌 9단을 꺾었고, 결승에선 퉈자시 9단에게 2-1 승리를 거뒀다.

커제 9단이 2020년 제25회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신진서 9단을 2-0으로 돌려세우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기원 제공

이어진 2017년 제22회 대회에선 ‘중국 바둑계 신사’ 구쯔하오 9단이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준결승엔 한국은 안국현 9단 홀로 남았고, 나머지 세 자리가 중국 기사였다. 구쯔하오는 4강에서 퉁멍청, 결승에선 삼성화재배 통산 두 번째 우승을 노리던 탕웨이싱을 제압했다.

2018년 제23회 대회는 안국현이 한국 팬들에게 ‘삼성화재배의 사나이’로 각인된 무대였다. 지난기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삼성화재배 4강 무대에 한국은 단 한 명이었고, 그 주인공은 같았다. 바로 안국현 9단이었다. 22회 대회 4강에서 탕웨이싱에게 막혔던 안국현은 23회 대회 준결승에서도 다시 한번 탕웨이싱을 만났다. 같은 기사들이 2년 연속으로 같은 세계대회에서 4강전을 펼친 역사는 오랜 바둑 역사에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안국현은 다시 만난 탕웨이싱 9단과 준결승 3번기를 2-0으로 승리하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대회 세 번째 우승을 노리는 명실 상부한 세계 일인자 커제 9단이었다. 커제 9단은 결승전 대국을 앞두고 기자와 만나 “준결승에서 당연히 탕웨이싱이 승리할 줄 알았는데, 안국현이 2-0으로 이기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면서 “지금으로서는 안국현이 가장 어려운 상대”라는 임전소감을 전했다. 실제로 당시 결승 3번기 1국에서 안국현은 커제를 상대로 선취점을 올렸다. 하지만 커제가 2-3국을 연승하면서 결과는 커제의 2-1, 역전 우승이었다.

이 대회에서 커제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남긴다. 커제 9단은 “최근 삼성화재배 존속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했다”면서 “전통과 권위의 삼성화재배는 프로기사를 위한 최상의 대국 환경을 제공하는 최고의 세계대회”라고 치켜세웠다. 이어 “바둑 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소중한 대회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당시는 중국 주최 세계 대회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던 시기로, 삼성화재배 외에도 메이저 세계 타이틀은 많았고 심지어 상금은 중국이 주최하는 대회가 더 컸다. 때문에 중국인인 커제 9단이 한국 기자에게 인터뷰 질문에도 없던 내용을 먼저 언급하면서 삼성화재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비단 커제 9단의 인터뷰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존폐 갈림길에 섰던 삼성화재배는 이후에도 아낌없는 애정으로 대회를 물심양면 후원했고 결국 올해 30주년을 맞았다. 중국 기사들이 가장 우승하고 싶은 메이저 세계대회로 삼성화재배가 늘 첫 손에 꼽히는 것 또한 우연은 아니다.

신진서 9단은 2022년 제27회 삼성화재배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기원

2019년 제24회 대회에선 다시 탕웨이싱, 25회 대회는 커제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중국은 6년 연속 삼성화재배 왕좌에 오른다. 6년 동안 커제-커제-구쯔하오-커제-탕웨이싱-커제 순으로 정상에 올랐다. 혜성 같이 나타난 중국의 커제 9단은 이세돌 9단이 보유하고 있던 단일 메이저 대회 통산 4회 우승 대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2020~2021년 제25~26회 대회에선 한국이 오랜만에 2년 연속 정상에서 활짝 웃었다. 이번 3편 삼성화재배 후기 10년 역사에 딱 두 번 등장하는 바로 그 우승이다. 먼저 2021년 제25회 대회에선 준결승에 나란히 진출한 한국 바둑 신흥 쌍두마차 신진서 9단과 박정환 9단이 각각 양딩신과 자오천위를 제압하고 결승에서 만나는 쾌거를 이뤘다. 지난 2007년 제12회 대회 이세돌-박영훈 결승전 이후 무려 13년 만에 등장한 한국 기사 간 결승이었다.

결승에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박정환 9단이 신진서 9단에게 2-1로 역전 우승했다. 신진서 9단이 결승 1국을 먼저 따내기도 했고, 이 무렵은 ‘남해 7번기’에서 신 9단이 7-0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박정환 9단으로선 버거운 승부로 보였다. 하지만 박 9단은 결승 2국과 3국을 연승하면서 정상에 섰다. 박 9단은 몽백합배와 춘란배에서 박영훈 9단에게, LG배에서 김지석 9단에게 승리하는 등 세계대회 결승에서 한국 기사와 대결은 모두 승리하는 진기록을 이어갔다.

2020년에는 커제 9단, 2021년에는 박정환 9단에게 결승에서 뼈 아픈 패배를 당한 신진서 9단은 절치부심, 2022년 제26회 삼성화재배에 3년 연속으로 결승에 올랐다. 신 9단은 이 대회 8강에서 박정환 9단과 만나 전기 대회 결승 패배를 설욕했고, 4강에선 김명훈 9단을 제치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놀랍게도 여자 랭킹 1위 최정 9단이었다.

삼성화재배는 여타 세계대회와 달리, 시니어조-신예조는 물론 ‘여자조’를 따로 두고 본선 진출자를 선발한다. 최정 9단은 2022년 제26회 삼성화재배 통합 예선에서 여자조로 출전했고, 예선 결승에서 김은지 9단에게 승리하면서 본선에 합류했다.

조치훈 9단이 와일드카드로 출전해 우승까지 차지한 전례가 있었지만, 이 당시에는 ‘시니어조’와 같은 개념은 없었다. 삼성화재배 역사에서 시니어조나 신예조 혹은 여자조 출신으로 본선에 합류한 기사가 결승까지 오른 건 2022년 최정 9단이 아직까지도 유일무이하다. 신진서 9단은 최정 9단과 승부를 2-0으로 제압하면서 염원하던 삼성화재배 첫 정상에 오른다.

신진서 9단이 우승을 차지한 2022년 제27회 대회는 코로나19 전염병 확산 탓에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한국기원 제공


신진서 9단의 3년 연속 결승 진출(우승 1회, 준우승 2회)과 한국의 2년 연속 우승(박정환-신진서)이 이어지자 삼성화재배에서 다시 한국 기사가 강세를 이어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졌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중국 기사가 있었으니, 신진서 9단과 2000년생 동갑내기인 딩하오 9단이다.

딩하오 9단은 일찍이 신진서 9단이 ‘라이벌’로 인정한 기사다. 신 9단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중국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를 묻는 질문에 “중국 바둑은 층이 두터워 상위권 기사들이 대체로 강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딩하오 선수가 경계 대상 1호”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어 신 9단은 “딩하오가 아직 세계대회 우승이 없지만, 언젠가는 무조건 메이저 대회를 우승할 것으로 본다”로 고평가했는데, 실제로 이와 같은 분석이 2023년에 들어맞았다.

2023년~2024년 제28~29회 삼성화재배는 중국의 독무대였고, 단독 주연은 딩하오 9단이었다. 딩하오 9단은 28회 대회에서 준결승 박정환 9단, 결승 셰얼하오 9단에게 승리하며 첫 정상에 올랐다. 셰얼하오 9단은 LG배 우승 경력이 있는 강자였으나 결승 시리즈에선 오히려 세계대회 첫 결승에 오른 딩하오의 ‘강심장’이 빛났다.

이듬해 2024년 제29회 대회 준결승엔 한국 선수가 한 명도 없다. 한국은 8강에서 모두 탈락했고, 4강부터는 중국 잔치였다. ‘디펜딩 챔피언’ 딩하오 9단은 8강에서 세계 랭킹 1위 신진서 9단을 격침하면서 우승자로서 자격을 스스로 입증했다. 준결승에선 진위청, 결승에선 당이페이를 제압한 딩하오는 2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2025년 제30회 삼성화재배 우승자 랴오위안허 9단(왼쪽)과 준우승자 딩하오 9단.


올해 30주년을 맞은 제30회 대회에서도 결승에 오른 딩하오 9단은 1편에서 등장했던 이창호 9단의 전무후무한 ‘메이저 세계대회 3년 연속 우승’ 이후 두 번째로 3연패에 도전하는 기사가 됐다. 결승까지 진격한 딩하오 9단은 2000년생 동갑내기 랴오위안허 9단과 중국 내전에서 0-2로 패하면서 준우승, 결국 이창호의 대기록을 넘어서진 못했다.

한편 세계 최초로 ‘통합 예선’ 개최, 월드조 신설에 이어 본선 32강부터 결승까지 한 번에 진행하는 방식을 도입하는 등 세계 바둑 역사를 이끄는 수많은 시도를 했던 삼성화재배는 올해 ‘같은 국가 피하기 룰’을 폐지하면서 또 다시 혁신에 나섰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존 세계대회는 예외 없이 매 라운드 대진 추첨 시 동일 국가 선수가 대국하는 걸 최대한 방지하는 방식(한 번의 추첨으로 결승까지 대진표가 가려지는 대만의 응씨배는 예외)으로 진행한다. 이에 따라 바둑 세계대회는 개인전임에도 국가 대항전 성격이 강했다. 세계 바둑 역사를 선도해온 삼성화재배에서 이 룰을 폐지하고 전면 무작위 추첨을 도입하면서, 30주년을 맞은 올해 대회에선 초반부터 흥미로운 대진이 속출했다. 이제 삼성화재배는 기존 ‘국가 대항전’과 같았던 성격을 탈피하고 진정한 ‘별들의 제전’으로서 다음 챔피언을 기다린다.

이창호 시대 개막 알린 전무후무한 3연패 [삼성화재배 30년사①]
불세출의 승부사 이세돌, 4회 우승 금자탑 [삼성화재배 30년사②]
중국이 인정하는 명품대회, 레전드 커제 탄생 [삼성화재배 30년사③]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