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분리 빗장 풀기, 신성불가침 영역인가 [취재진담]

금산분리 빗장 풀기, 신성불가침 영역인가 [취재진담]

기사승인 2025-11-28 10:34:10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21일 정부세종청사 공정위 기자실에서 출입기자단 간담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금산분리 완화는 최후의 수단이다. 성급한 판단으로 규제를 허무는 실수를 해선 안 된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현안으로 부상한 ‘금산분리 완화’ 질의에 이렇게 찬물을 끼얹었다. 재계의 요구에 대해서는 “수십 년 된 규제를 몇 개 회사의 민원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못 박았고, “규제 탓만 하지 말라”는 훈계도 덧붙였다.

주 위원장의 입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과 배치된다. 당초 금산분리 완화론의 물꼬는 이 대통령이 텄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1일 챗GPT 개발 업체인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AI 분야에 한해 금산분리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환경에서 규제를 무조건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선(善)이라고 보긴 어렵다”며 호응했다. 한국 기업들만 ‘글로벌 AI 전쟁’에서 뒤처질 수 없다는 절박함의 발로였다. 

주 위원장이 사수하려는 금산분리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사이에 칸막이를 두는 원칙이다.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를 4%로, 은행의 비금융회사 지분은 15%로 제한하는 것이 골자다. 재벌의 사금고화와 기업 부실의 금융 전이를 차단하기 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43년이 흘러 산업·금융의 경계가 허물어진 ‘빅블러’ 시대가 왔다. 금산분리는 신산업 투자 돈줄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 지 오래다. 

세계는 AI 패권을 잡기 위해 이미 ‘쩐의 전쟁’에 돌입했다. 글로벌 빅테크들의 AI 인프라 투자액은 연간 수백조원에 이른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과 400억달러(약 59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구글과 아마존 역시 사모펀드와 합작해 수조 원대 자금을 수혈받고 있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경쟁국들은 금산 융합을 유연하게 허용하며, AI 생태계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금산분리 족쇄’에 손발이 묶였다.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는 펀드 운용사를 자회사로 둘 수 없다. 미국처럼 빅테크와 금융사가 대규모 합작 법인(JV)을 만들어 투자하는 것은 꿈도 못 꾼다.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설립은 4년 전부터 허용됐지만, 100% 자회사 형태로만 설립할 수 있다. 데이터센터 하나 짓는 데 수조 원이 드는 현실에서, 엄격한 규제가 기업의 혁신 골든타임을 갉아먹고 있다. 

금산분리 완화를 성역으로 여기는 건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금산분리 완화는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가 아니다. 국가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당장 오픈AI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삼성, SK 등 국내 기업이 협력하기 위해 대규모 자금 조달이 시급한 상황이다. 전면 폐지가 어렵다면, 부분 완화나 특별법 제정으로라도 숨통을 틔워야 한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자본과 속도에 달렸다. 세계 각국이 앞다퉈 뛰고 있는데 대한민국만 갈라파고스 규제에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없다. 정부 내 엇박자를 조속히 정리하고, 민·관이 중지를 모아 규제 혁신 속도를 높여야 한다. 하루 빨리 정부가 답할 차례다.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
최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