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98)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98)

그림 앞에서 울다: 미술관에서 만난 세잔, 그리고 아버지

기사승인 2025-12-08 09:52:43
폴 세잔,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1888~90, 캔버스에 유채, 81.2x 65cm, 뉴욕 현대 미술관: 이후 모마(MoMA)와 병기(倂記)

예술의 기능: 기억, 감상, 희망

중학교에 갓 입학한 3월, 언니의 그림이 교실에 걸려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방과 후 조용한 교실을 찾아 들어가 갈색 액자 속 그림을 바라보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그림은 폴 세잔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을 따라 그린 것이었다. 언니의 손끝에서 피어난 명화는 교실 한편에서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술은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는가: 성장, 슬픔. 자기 이해, 균형 회복 

그 시절, 겨울방학이면 아침마다 남동생과 스케이트를 타곤 했다. 오후엔 미리 받은 2학년 미술교과서 명화를 따라 그리며 스케치북을 채워 나갔다. 언니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고, 아버지는 <세계 명화>와 <한국 작가 100선>을 집에 들이셨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의 미술에 대한 짝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뉴욕 모마에서 그 그림과 다시 마주했다.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세잔의 붓끝에서 태어난 그 소년은, 내 기억 속 언니의 그림과 겹쳐지며 아버지의 추억과 그 시절의 공기까지 불러왔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효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예술이 남긴 순간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그림이 시작되었을 것이라 그 기원을 설명한다.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거나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핸드폰을 든다. 

“미술은 경험을 보전하는 방식이며, 우리 주변에 일시적이고 아름다운 경험들이 많은데, 그런 경험을 마음에 담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미술은 복잡성을 자르고 다듬어, 비록 간략하지만, 가장 의미 있는 양상들에 집중하게 해준다.” 

예술가들은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소리 없는 드라마의 정서적 의미를 강화시켜, 우리가 보다 쉽게 접근하게 하고, 거기에 마땅한 가치와 중심적 위치를 부여한 작품을 미술관에서 만나게 한다.  

이탈리아 소년: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세잔은 수줍음이 많고 오랜 시간 관찰하기에 전문 모델을 거의 고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 디 로사(Michelangelo di Rosa)라는 이탈리아 소년을 모델로 세웠다. 세잔은 빨간 조끼를 입은 디 로사를 네 점의 유화와 두 점의 수채화 연작으로 그렸다. 이 그림의 첫 번째 소유주였던 클로드 모네는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그림”이며, “세잔은 우리 모두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상찬했다. 
모마(MoMA)의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와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예술의 미래를 설계한 여성, 릴리 P. 블리스(Lilie P. Bliss)

“모마의 미래는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블리스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미술관의 비전을 설계하였다. 그녀가 1934년 기증한 세잔의 작품들은 모마의 정체성을 형성했고, 그녀의 결단은 미술관을 단순한 전시공간에서 '예술의 흐름을 바꾸는 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모마(MoMA)의 공동 설립자 릴리 P. 블리스(Lilie P. Bliss), 위키피디아 

블리스와 현대 미술의 탄생

20세기 초, 현대미술은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다. 대중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평단은 조롱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몇몇은 그 속에서 빛을 보았다. 블리스는 그중 하나였다. 폴 세잔, 오딜롱 르동, 조르주 쇠라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을 수집하며, “말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자유를 주장한다.”고 믿었다.

블리스는 예술가들의 내면을 읽고, 그들의 실험을 지지했다. 그녀의 컬렉션은 단순히 그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시선과 용기의 기록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판매해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새로운 작품을 구입했고, 이를 통해 젊은 박물관이 컬렉션을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주목을 피한 그림자 속의 별빛 

놀랍게도 블리스는 아직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충분히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녀가 세간의 주목을 피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생의 마지막에 블리스는 자신의 개인 서류를 불태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부분 상상의 미술로 남겨졌지만, 그녀가 사랑했던 예술작품들은 여전히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은 달랐다. 이 작품은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6~1939)를 통해 클로드 모네가 지베르니(1895)에서 소장하다 둘째 아들 미셸에게 물려준다. 이후 화상 폴 로젠버그(Paul Rosenberg, 1881~1959)에 의해 런던으로 팔려갔다. 다시 폴 로젠버그에게서 존 D. 록펠러 주니어와 애비게일 부부가 구입하여, 1955년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 Rockefeller, Jr., 1874~1960), 위키피디아 

존 D. 록펠러 주니어: 자본을 문화로 바꾼 사람

존 D. 록펠러 주니어는 스탠더드 오일의 창업자 존 록펠러의 외아들로 태어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투자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대공황 시기, 그는 뉴욕 중심에 록펠러 센터 건설 자금을 제공하며, 도시 재건에 앞장섰고, 유엔 본부 부지 기증, 콜로니얼 월리엄스버그(Colonial Williamsburg) 복원, 록펠러 재단과 대학 설립 등 문화와 공공을 위한 기여로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콜로니얼 월리엄스버그는 18세기 식민지 시대의 도시를 버지니아주에 되살린 야외박물관이자 문화유산 사업이다.

그는 부는 쌓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철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맨해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록펠러 센터
 
애비게일 그린 올드리치 록펠러(Abigail Greene Aldrich Rockefeller, 1874~1948), 위키피디아

예술과 이상, 사랑으로 엮인 삶: 애비게일 올드리치 록펠러 이야기

1900년대 초, 미국 상류사회의 중심에서 한 여인이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는 흔적을 남겼다. 애비게일 그린 올드리치 록펠러는 예술을 사랑하고, 사회 정의를 꿈꾸며, 자선에 헌신한 단순한 재벌 가의 아내가 아닌,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가이자 행동가였다.

애비게일은 1894년 가을, 젊은 시절의 존 D. 록펠러 주니어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1901년, 그녀의 아버지가 소유한 여름 별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단순한 가문 간의 결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신념과 이상을 존중하며 함께 성장해 나갔다.

결혼 후, 부부는 맨해튼 웨스트 54 번가에 정착해 5남 1녀를 두며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애비게일의 삶은 가정에만 머물지 않았다. 

뉴욕 현대 미술관(MoMA), 사진: Marika Simon 

대공황 속에서 피어난 모마(MoMA)

1929년 가을, 미국은 대공황의 그림자에 휩싸이고 있었다. 월 스트리트의 붕괴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예술은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때, 뉴욕 한복판에서 전혀 다른 꿈을 꾸는 이들이 있었다. 

애비게일 올드리치 록펠러, 예술을 사랑했고, 그 가치를 믿었다. 그녀의 친구 릴리 P. 블리스, 메리 퀸 설리번과 함께 미국 최초의 현대미술관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세 여성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발상을 품고 있었다. 유럽의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그리고 현대미술을 미국 대중에게 소개하겠다는 것,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순탄치 않았다.

가장 큰 반대자는 다름 아닌 애비의 남편, 존 D. 록펠러 주니어였다.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미술관을 세우는 건 무모한 짓이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애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예술이야 말로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빛은 어둠에서 시작된다: 모마(MoMA)의 첫 불꽃

그리고 마침내, 1929년 11월 7일, 뉴욕 현대 미술관은 맨해튼 5번가의 한 임시건물에서 조용히 문을 열었다. 첫 전시는 단출했지만 강렬했다. 폴 세잔, 폴 고갱, 조르주 쇠라, 빈센트 반 고흐- 네 명의 작가를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소개하며, 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기념전이 펼쳐졌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5주간 5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았다. 사람들은 불황 속에서도 예술을 갈망했고, 모마(MoMA)는 그 갈망에 응답했다. 이 작은 시작은 곧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관으로 성장하는 씨앗이 되었다.

모마(MoMA)의 탄생은 단순한 미술관 개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예술이 시대를 견디는 힘이자,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인간 정신의 증거였다.  

19개의 상업용 건물로 이루어진 록펠러 센터 전경 모형 

예술을 사랑한 정치가: 넬슨 록펠러의 이야기

올드리치와 록펠러 주니어의 둘째 아들인 넬슨 올드리치(Nelson Aldrich, 1908~1979)는 미국의 공화당 정치인으로 뉴욕 주지사(1959~1973)와 워터게이트로 사임한 닉슨의 뒤를 이은 포드 대통령의 부통령(1974~1977)을 지냈다. 넬슨은 어머니에게서 근대 예술의 취향을 물려받아 평생 예술을 수집하고 후원했다. 그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활동하며, 어머니의 유지를 이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홍석원 기자